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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un's Library

 

 “굶어 죽지 않고 한국에 다시 와 노래하는 게 꿈이었는데... 내년에도 굶어죽지 않고 잘 자란다면 파일럿이 되고 싶습니다.”




   채널을 돌리다 한 예능 프로에서 또박또박 말을 하는 아프리카 아이를 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케냐 지라니 어린이 합창단 아이들 중 한명이 새해 소원을 말한 거였다. 영화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처럼 암에 걸려 투병하는 아이도 아니고,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건강한 아이가 “내년까지 굶어죽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을 하니 그 아이에게 피자를 먹으며 TV를 보는 내 모습을 들킨 것처럼 겸연쩍고 미안했다. 오랜만에, 모처럼 푹 쉬어 보자고,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 뒹굴어보자고 마음먹은 주말을 죄책감이 급습했다. 저 어린 아프리카 아이들은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어려워서 영양실조로 죽어 간다는데 난 허구한 날 남아도는 칼로리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지금 또 뭘 먹고 있는 거지?




   우울하거나 무기력할 때, 뭔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날 때, 이상하게 피자, 치킨, 햄버거 같은 무식하게 칼로리 높은 음식들이 당긴다. 먹지 말아야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강력하게 당긴다. 저항하면 할수록 유혹은 커지고 어느새 나는 피자 가게에 전화를 걸어 주소를 말한다. 이동 통신사 카드로 가격 할인을 받는 것도 잊지 않는다. 경제를 생각해서! 그리고는? 먹고 나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한다. 왜 먹었을까? 도대체 왜? 후식처럼 죄책감이,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이 밀려온다. “내년까지 굶어죽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하는 아프리카 아이까지 보니 전방위적인 죄책감이 밀려왔다. 칼로리 과잉 사회에서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에 갇혀 살다보니 사람이 암이나 교통사고, 자살이 아니라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하루 세끼를 다 먹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된 게, 칼로리가 넘쳐나서 비만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들만 해도 배고픔을 겪은 세대다. 지난달 필리핀 출장 때, 바이어인 노니(Nonie)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같이 살면서 아침식사 준비부터 시작해서 애들 넷 도시락 다 싸주고, 청소, 빨래, 저녁 설거지까지 다 해주는 메이드 월급이 한 달에 3,000페소(Philippine Peso)라는 노니의 말에 놀란 나는 마시던 물을 뱉을 뻔 했다. 3,000페소면 원화로 9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이다. 그런데 한 달 월급이 3,000페소라니! 노니한테 너무 조금 주는 거 아니냐고 물어 봤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밥 주잖아.” 난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밥 주잖아.” 그렇다. 아직도 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는 하루 세끼 밥을 다 먹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 세끼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먹여주고 재워만 줘도 감지덕지하며 식모살이를 했던 몽실이 언니, 봉순이 언니처럼. 




   어린 케냐 소년의 “굶어죽지 않는다면”이란 말이 자꾸만, 빙그르르 머리를 맴돌았다. 얼마 전 선물 받고 책상에 올려 두었던 책, 션, 정혜영 부부의 <오늘 더 사랑해>에 눈이 갔다. 책을 쭉 넘겨봤을 때 본 아프리카 아이들 사진이 생각나서다. 책을 펼쳐 사진들을 보다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읽으면서 내내 미소가 지어지는, 마음이 훈훈해지는, 동시에 션, 정혜영 부부의 “나눔”이 존경스러워지는 책이었다. 연예인 커플이니 외모가 멋지고 예쁜 건 당연하지만,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도 참 아름답다. 하루에 만원 씩 모아 결혼기념일 마다 365만원을 무료급식소 ‘밥퍼’에 기증하고, 분유 광고를 찍고 받은 출연료를 북한 어린이들 분유 값으로 보내고, 국제 어린이 양육 기관인 컴패션을 통해 많은 아동을 후원하는 아름다운 부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건 서울대 어린이병원에서 치른 첫 아이의 이색적인 돌잔치다. 떠들썩하게 호텔에서 돌잔치를 하는 대신 그 비용으로 두 명의 아이가 심장병 수술을, 한 명의 아이가 인공와우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할 수 있었을까? 꼭 기억해 뒀다가 언젠가 내 아이의 돌잔치에 따라 해야겠다.^^




   남은 피자를 박스 채로 냉장고에 넣으며 생각했다. 아프리카 아이 한 명이 한 달 동안 먹고, 입고, 의료혜택을 받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월드비전의 한 달 후원금이 2만원, 내가 먹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는 피자 한판은 2만 5천원. 한 달에 한 번, 충동적으로 피자를 시키지 않으면 “굶어죽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한 아프리카 아이를 도울 수 있다. 물론 나의 건강과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생각했을 때 바로 실천하자!’는 좌우명 하에 난 지라니 어린이 합창단 홈페이지를 방문, 정기 후원 신청을 했다. 한 달에 2만 5천원. 피자 한 판 값으로 한 아이가 굶어죽지 않게 도울 수 있다니 다행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내게 작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션, 정혜영 부부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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