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아츠시 소설 전집>을 읽고
케이 2025/09/1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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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지마 아츠시 소설 전집
- 나카지마 아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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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 2024-05-25
: 552
나는 2002년에 20살이었다. 2002년을 기억하시는 분은 알 것이다. 전 국민이 월드컵 열기에 빠져 대한민국을 외치고 환희에 젖었다는 것을. 그 시기 20살이었는데도 길거리 응원 한번 안 나간 사람? 바로 나다.
남들과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니고 특별하고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난 못 어울리는 인간인 것이다. 세상에는 정규분포 표 양 끝단의 사람도 있는 거니까. 이런 이유로 나츠메 소세키의 <행인>을 읽고 많이 울었다.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서 일평생 사람들과 못 섞이는 자로서 느낀 슬픔과 고뇌였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나의 성향으로 인해 날려버린 수많은 기회들과 초라한 현실을 생각하며 원통할 때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행인>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을 나카지마 아츠시의 소설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소세키 소설은 가끔씩 아주 잠깐이나마 헛웃음으로 웃기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는데 정말 이 사람 소설은 단 한 줄의 유머도 등장하질 않는다.
지병인 폐병을 고칠 생각으로 간 팔라우에서 혼자 민가를 돌아다니다 노골적으로 자기를 유혹하는 젊은 아기 엄마를 보며 내가 저 여자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몸 상태가 아님을 자각하는 장면 이거 하나 조금 웃기고 실린 모든 소설이 다 진지하다.
몸도 허약한 양반이 이역만리 팔라우까지 고생스럽게 갔는데 병에 차도가 있기는커녕 뎅기열 이질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일본으로 돌아와선 결국 33살에 명을 달리한 나카지마 아츠시. 중학생 때 밤새 기침에 시달리며 자기의 수명이 길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끝까지 병을 고치려고 노력했고 학교 선생 등의 생업을 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써 내려간 사람. 불행한 가정환경과 허약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인생을 비관하지 않고 타인의 인생을 (그것이 식민지의 사람일지라도) 비웃지 않았던 그의 태도에서 어떠한 품격을 느꼈다. 특히 난 끝까지 처자식 딸린 가장으로서 돈을 벌고 또 무책임하게 본인의 생을 스스로 끝내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또 잠도 못 자게 아픈 와중에도 중국 대련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게 안타까우면서 좀 슬펐다.
사춘기를 서울 용산에서 보내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나카지마 아츠시는 일본인으로서는 특이하게 조선인 관점에서 쓴 소설도 실려 있는데, 한국인으로서 아무래도 편히 읽기는 쉽지 않다. 다만 식민지의 사람들을 무조건 딱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동정이 오히려 지배국 시민으로서 시혜를 베푸는 듯한 모양새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런 시선을 가진다면 소설이 유치해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리네시아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들을 읽을 땐 지배국 출신 사람이 써 내려간 글을 한국인인 내가 편히 읽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약간의 식민통을 느꼈다. 분명히 일본인들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말 못 할 짓들을 많이 했을 텐데 소설에는 전혀 등장하질 않으니 말이다.
이미 문예출판사 <산월기>에서 읽었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D 시의 7월 서경> 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중국 대련에 주재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간부, 그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일본인, 그리고 대련에 원래 살던 피지배층 세 명의 관점에서 중국 대련시의 상황을 묘사한 소설인데 장편으로 구상했던 <북방행>의 시초 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D 시의 7월 서경>을 읽고 나니 장편소설을 완성하고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더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가 스티븐슨이 폴리네시아 사모아에서의 살던 시절을 쓴 <빛과 바람의 꿈> 은 아무래도 전자책이라 잘 안 읽히는 것 같아 종이책을 샀다. 다시 읽을 예정이다.
사후에 제2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고 칭송받았다는데 뭐 나 같은 사람이 말할 자격은 없지만 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소설보다 훨씬 좋게 읽었다. 전집을 읽었으니 이제 더는 나카지마 아츠시의 새로운 소설은 못 읽겠지만, 앞으로도 종종 다시 읽을 것 같다. 내가 <행인>이나 <그 후>의 좋아하는 페이지를 아직도 찾아 읽는 것처럼.
사족. 책에 대한 불만.
1. 번역이 너무 성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라든가.라는 말이 너무너무 자주 진짜 한 페이지에 어쩔 땐 거의 열 번 이상 등장한다. 예를 들면 <빛이라든가, 어둠이라든가.>라는 일본어 문장이 있다고 치자. 한국어로 번역할 땐 그냥 <빛과 어둠>이라고 써도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굳이 라든가를 쓴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 읽다 보면 <라든가> 노이로제 걸려버려.ㅋㅋㅋㅋㅋㅋㅋ 읽다가 너무 열이 받아 <라든가>가 세 번 이상 나오는 페이지 표시해놨는데 귀찮으니 여기 쓰진 않겠다. 번역가님이 의대 수료하신 분이고 잘난 분이니 내가 말한다고 보실 리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라든가>쓰는 것 좀 자중해 주셨으면.
번역은 확실히 문예출판사의 <산월기>가 좋다.
2. 소설가 자신이 모델인 <산조>라는 인물이 어려번 등장하고 또 그 인물의 중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 선생 시절, 팔라우 시절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많이 등장하는데 실린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오히려 역순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 출판된 전집이 이런 순서인 건지 아니면 뭐 다른 의도가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출판사 직원이라면 중고등-대학-선생-팔라우 이렇게 시간순으로 단편소설을 썼을 것 같다.
아니면 소설가의 자전적 이야기만 모아놓은 장을 하나 더 만들든지.
소설의 화자가 팔라우에 있다가 갑자기 중학생이 되었다가 학교 선생님 하다가 또 갑자기 대학시절이 나오니 읽기 조금 힘들었다.
나중에 다시 읽을 땐 자전소설만 따로 모아 시간순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계류가 흘러 깍아지른 절벽 가까이까지 오면, 한 번 소용돌이를 치고 나서 이번에는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오정이여, 너는 이제 그 소용돌이 한 발짝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한 발짝 나가 휩쓸려 버리고 나면, 나락까지는 단숨. 그 도중에 사색이나 반성이나 머뭇거릴 틈은 없다. 겁쟁이 오정아. 너는 소용돌이치며 떨어져 가는 자들을 공포와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자신도 결단해서 뛰어들 것인가 말 것인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휩쓸리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너는 방관자의 위치에 연연해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엄청난 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무리들이 의외로 곁에서 보는 것처럼 불행하지는 않다는 것(적어도 회의적인 방관자보다는 몇배나 행복하다)을, 어리석은 오정이여 너는 알지 못하느냐.
-<오정출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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