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는 누가 봐도 이반 투르게네프를 모델로 한 소설가가 한 명 나온다. 대문호님께서 그 소설가를 얼마나 철저하고 가차 없이 조롱하는지, 아니 한때 친구였던 사람을 이렇게 써도 돼? 하면서도 너무 웃겨서 깔깔 웃었더랬다.
<연기>를 읽으니 이반 투르게네프도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인데, 도선생님이 <악령>에서 너무 했단 생각이 든다.
러시아의 대문호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들은 그냥 모든 글을 잘 쓰는구나... 심지어 남을까는 글까지!!!! 란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에 체호프가 <지루한 이야기>에서 맘에 안 드는 예비 사위한테 새우 냄새가 나게 생겼다고 한 거나, 이번 <연기>에서 투르게네프가 얼굴이 너무 탄력이 없어서 마치 한번 푹 삶은 거 같다고 하는 거나, ㅋㅋㅋㅋ 아니 어쩜 욕 한마디 안 하고 그렇게 남을 잘 욕하는지. 진심 본받고 싶은 능력이다.
<연기>는 서른 살 리트비노프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첫사랑 이리나에게 이끌리지만 결국 모든 것이 연기라고 되뇌며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러시아의 실상에 대해 동포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처음에는 좀 지루했는데, 이런 소설의 대화 기록이 자국에선 시대상 파악에 참 소중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를 너무 사랑해 마지않는 도스토옙스키와 달리 서유럽에 비해 한참 덜떨어진 자국이 못내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흠.... 근데 같은 시기 소설 수준을 보면 내가 보기엔 절대 러시아가 뒤처지지 않는데!) 투르게네프가 유럽을 떠돌아서 그렇다기엔 도선생님도 스위스도 가고 독일도 꽤 갔던 양반이니 그냥 기본 마음가짐이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연기>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대학생 리트비노프가 이리나에게 고백하고 당장이라도 물속에 뛰어들고 싶다고 한 장면인데, 책을 집에 두고 와서 쓸 수가 없네. (현재 사무실임)
사랑 이야기지만 남자 여자 마냥 멋지고 예쁘게만 그려지지 않는 점이 좋았다. 특히 이리나라는 캐릭터가 절세 미녀에 제발 나를 이 허황된 세계에서 꺼내달라고 애원하는데도 독자로 하여금 그녀를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게 한 게 좋았다. 그래서 읽다 보면 이 여자가 끝내 리트비노프에게 자기의 일생을 던지지는 못할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리트비노프도 잘생긴 편에, 첫사랑에 온 인생을 던지는 어찌 보면 낭만적인 남자이지만, 다른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처럼 마냥 멋지게만 그려지진 않는다.
예전에 <언페이스풀> 이라는 영화에서 젊은 남자랑 바람난 초미녀 겸 유부녀 다이앤 레인과 정부가 붙어먹는(?) 장면에서 서로 웃고 좋아죽는데도 그 어떤 사랑도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한 게 좋았는데 엉뚱하지만 <연기>도 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리트비노프가 이리나의 제안, 즉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꽂아준 직장에서 일하며 평생 내 내연남이나 하라는 제안을 거절했을 땐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기차가 떠나기 전 이리나한테 옆자리 비어있다고 가리킬 때까지도 그는 이리나가 옆자리로 오리라 기대를 했을까?
이리나가 탔다 한들 케이크만 먹던 여자가 '흙빵' 같은 리트비노프에게 만족했을 리 없겠지.
마지막에 과거 약혼녀 타냐가 리트비노프를 용서함을 암시하며 끝나는데, 리트비노프가 다시는 유혹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