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제단.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고른 책이다. 감정의 칼날을 세워 예리하게 뚝뚝 끊어버리는 문장이 아닌,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면서 자극적이지 않고 깊이가 있으며 냉기와 온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그녀의 문체가 좋다.
교교한 달빛이 흐르고 유서 깊은 종택의 지붕 위에는 푸른 기운이 감돈다. 혼자의 힘으로 무너져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세우신 한없이 냉정하고 강건하신 할아버지, 못난 아비와 인정 받지 못한 방탕한 어미 사이에서 태어나 서자의 신분에 억눌려 모퉁이에 서서 자라는 차장손 상룡. 그들의 이야기가 효계당의 사당과 사랑방, 뒷마당에서 전통과 제례 의식 사이를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이어 액자 속으로 들어가면 10대 조모 소산 할매와 친정 할머니 사이에 주고 받는 언찰이 애처로이 놓여있다. 할아버지와 상룡 사이에 흐르는 냉랭함, 소산 할매와 할머니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온기가 크로스 되어 이야기는 감정의 중심을 잡아간다.
할아버지가 소중히 여기시는 당당하고 푸른 빛이 일렁이는 효계당은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후손을 돌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강인함,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장치로서 효계당은 존재한다. 그 부귀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효계당은 넓고 따뜻한 햇살이 드리우긴 하나 동화 '거인의 정원'마냥 언제나 꽃이 피지 않고 새가 울지 않는 겨울이다.
겨울 속에서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상룡은 정실에게서 봄을 느낀다. 집안의 부엌데기로 80키로의 뚱뚱이 정실이 주는 푸근하고 말랑말랑한 살덩어리는 상룡에게 잃어버린 모성애를 안겨준다. 나약하고 열패감에 사로잡혀 어디 한군데 정 붙이지 못하고 부유하던 상룡이 깊이깊이 빠져드는 정실의 품은 인간이라면 누리고 싶고 숨고 싶은 어미의 가슴이다. 정실 또한 사랑 따윈 받아보지 못하리라 체념하고 있던 심장에 불을 지펴 준, 씨앗을 뿌려 준 상룡이 하늘 같이 고맙다. 정실과 상룡의 조금 길다 싶은 성애의 장면도 거북하지 않으며 지긋한 웃음으로 바로볼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둘의 사랑이 진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상룡의 학습된 무기력으로 인해 정실이 끌려갈 때 모질게 대항하지 못하는 장면은 못내 아픔으로 다가왔다.
언찰 속의 소산 할매 또한 여인의 아픔을 전해 주었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한 하나의 생산 도구로서만 존해하는 여인네로 남편 잃은 설움도, 아이 잃은 절망도 모두 감내해야 한다. 언찰의 초반에 보내어지는 그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나날들이 연이는 불운에 의해 무너지고,결국엔 가문의 위엄 앞에서 스스로를 희생하여 여리고 푸른 기운으로 효계당을 떠돈다. 쌓아가고 이어가야하는 가문의 고리를 끊지 않고 연결해가기위해 윗돌 빼서 아랫돌 막고 아랫돌 빼서 윗돌 막으며 희생해야 하는 여인들의 지난한 대잇기는 가부장제의 권위아래서 한없이 흔들리는 풍전등화이다. 그녀들은 결코 제단의 제물이 되어서는 아니되며 오히려 보듬어주고 위로하는 푸른 관을 씌워주어야 한다.
할아버지가 세우시려던 가문의 위세는 한낱 종이 쪼가리에 의해 모두 사그라들고 만다. 타오르는 붉은 화염 속에서 사라지는 건 영화도 부귀도 효계당의 기름 먹인 나무 기둥도 아니요, 부끄러움이요, 여인들의 잔인한 기억이요, 오래 묵은 푸른 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