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위 <고비키초의 복수> - 나가이 사야코
에도시대, 아버지의 원수를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한 소년 검사가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실화 같은데 <고비키초의 복수>는 이 끔찍한 복수극의 이면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었나를 파헤친다. 간단한 줄거리만 듣고 책장에 피칠갑이 펼쳐지는 검객소설 같은 걸 떠올리고 지레 독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실은 칼부림 장면은 거의 안 나오는, 일종의 교양소설에 가깝다. 복수를 맹세하고 에도로 상경한 소년 검사가 머무르게 되는 곳이 당시의 극장(연극 공연장)이라 독자 역시 대략 200년 전 일본의 극장 풍속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그날의 흉행을 목격한 다섯 명의 인터뷰처럼 진행되는데 그들은 극장 호객꾼, 무술 감독, 소도구 담당, 의상 담당, 각본가로 전부 극장 관계자이다. 1인칭 화자인 5인은 각자의 시점과 자기만의 말투로 사건 당일의 목격담을 증언하는 한편,하필이면 당시에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연극판으로 흘러 들어온 개인사를 담담하게 늘어놓는다. 비록 다른 나라의 옛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뭇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주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엔터테인먼트' 종사자의 이야기들은 충분히 감동적이며,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한 수 배우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다만 '실은 그날 있었던 일이 알고 보니 이랬더랬다' 수준의 반전에 그쳐 추리소설이라기엔 좀 약한 건 사실이다. 트릭의 핵심이 되는 도구가 교묘하게 제시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인터뷰 형식을 빌린 시대소설이라는 점에서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떠올리게 하고, 전반적인 플롯도 극장만 요시와라 유곽으로 바꾸면 거의 대동소이한 마쓰이 게이코의 <유곽 안내서>와 비슷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마이너스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4위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이노우에 마기
오랜만에 선보이는 이노우에 마기의 신작이다. 전작들인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와 <성녀의 독배>가 꽤나 잘쓴 본격 추리소설이라 늘 후속작이 궁금했는데 한동안 출간이 없다가 아예 다른 장르로 돌아왔다. 일본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해 자연재해 중에서도 지진이 특히 빈발하는데, 신작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는 바로 그 지진 현장에서의 구조 활동을 다룬 본격 재난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저자는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젊은 작가답게 그동안 많이 나온 재난소설과 비교를 불허하는 두 가지 장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붕괴한 지하철 역사에서 구조 활동을 담당하는 존재가 바로 드론이라는 것. 붕괴가 너무 심각해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확보할 수 없으니 공중으로 자유자재 날아다니는 드론을 대신 투입하는 것이다. 두 번째이자 이 소설 궁극의 흥미 포인트는 구조 대상자가 그 유명한 헬렌 켈러처럼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3중 장애인이라는 데 있다. 안전을 확보하기에 극히 취약한 3중 장애인을 사람도 아니고 한낱 드론이 어떻게 구조할 수 있을까. 간단한 줄거리만 봐도 도파민이 팍팍 솟아오르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는데...의외로 분량도 짧은 데다가, 드론과 구조 대상자의 위태로운 2인3각(?)도 결정적인 위기까지는 가지 않는 채 대체로 스무스하게 풀린다. 무슨 소설이 이렇게 밍숭맹숭하지, 하면서 세모눈을 뜨고 보는데 어느새 결말이 코앞이다. 그리고 바로 그 결말에서야 이 소설의 핵심 미스터리가 풀리는데 가히 경천동지할 반전이 펼쳐진다. 결말을 읽고서야 왜 절체절명의 구조 활동이 비교적 스무스하게(?) 풀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더구나 단순히 오락성을 위한 반전만이 아니라 때로는 나보다도 남을 더 위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이타성과 어떤 시련이 닥쳐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네버 기브업 정신이 어우러져 숫제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재난소설로도, 감동소설로도, 추리소설로도 모두 적절히 기능하는, 그 어렵다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소설이다.
3위 <엘리펀트 헤드> - 시라이 도모유키
최근 몇 년째 본격 추리소설 분야에서 성가를 드높이고 있는 시라이 도모유키. 명탐정이 불가능 범죄에 맞서 단서를 모으고 탁월한 추리로 범인을 잡아내는 장르가 바로 앨런 포와 코난 도일 등이 대대적으로 유행시켰던 본격 추리소설이다. 현대에도 본격 추리소설은 (특히 일본에서) 꾸준히 창작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명탐정이나 불가능 범죄, 밀실 등의 주요 소재 자체가 고색창연하다 보니 다른 본격 추리소설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이다. 하지만 시라이 도모유키는 뛰어난 본격 추리소설가임에도 식인이나 토막살인 등 소재에도 한계가 없고 추잡하고 지저분한 섹스신을 비롯해 수위도 아예 끝까지 간다. 한마디로 본격 추리소설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인데 트릭이나 반전, 교묘한 플롯 뒤틀기 등 본격 추리소설가로서의 재주가 끝판왕 급이라 추악하고 더티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추리 독자들도 결국은 감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엘리펀트 헤드>는 눈쌀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끝내 매료시키는 작가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가작으로, 시쳇말로 약 빨고 쓴 느낌이다. 내용을 요약하기도 힘든데 몇 개의 분화된 인격이 일가족 살인사건을 각각 풀어 나간다. 반전의 반전이 연이어 일어나는 끝에 밝혀지는해결 편은 내 머리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데다가, 제정신인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기괴한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여러모로 굉장한 문제작으로 나라는 존재의 인격이 여러 개로 분화된다는 소재가 특히 일본 4대 기서 중 <도구라 마구라> 느낌이 난다. 아마 작가가 몇 십년 일찍 태어났으면 <엘리펀트 헤드>는 5대 기서가 되었을 것이다. 발상이 너무 사악하리만큼 기발한 경우 '악마적'이라는 말을 왕왕 쓰는데 이 소설은 띠지에 적힌 것처럼 악마적이 아니라 그냥 악마가 쓴 것 같다. 일본의 수많은 젊고 재능 있는 추리소설가들 중에서도 시라이 도모유키처럼 레이와의 기재, 혹은 레이와의 악마라는 두 가지 별명이 모두 잘 어울리는 작가는 또 없을 것 같다.
2위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80년대 중반에 데뷔해 현재까지 40년 넘게 추리소설을 쓰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한 분야에 평생을 바친 거장답게 최근 추리소설계의 흐름을 예리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요 몇 년간 추리소설계 최대의 화두는 '특수설정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너무 낡게 느껴지는 고전적인 추리소설 장치들을 대신해 초능력을 이용한 범죄나 천사, 좀비 등의 비현실적인 존재를 활용한 트릭, 마법이 예사로 사용되는 판타지 세계관에서의 살인 등 만화나 SF 등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특수설정'을 첨가한 미스터리가 최근까지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진부해지는 것도 유행의 특성, 아마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 게이고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화려하고 요란한 특수설정 놀음도 슬슬 질려가니 곧 고전적이고 고풍스러운 본격 추리소설의 흐름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라고. 그리하여 작가는 신작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에서 80년대 중반부터 본인과 함께한 가장 오래된 탐정 캐릭터 '가가 형사'를 다시 불러내는가 하면, 본격 추리소설계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오래된 '별장지에서의 살인'이라는 테마를 잡았다. 모든 것이 올드 패션이지만 확신은 있었을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완성도에 최선을 다하면 결코 외면받지 않는다는 확신 말이다. 무차별 대량 살인이라는 소재 자체는 일견 현대적으로 느껴지지만 인물 조형이나 치정이 얽힌 동기도 그렇고, 곧바로 밝혀지는 실행범 말고 소설의 진짜 핵심인 숨은 조력자를 밝혀내는 과정은 엘러리 퀸 스타일의 소거법을 사용하고 있다. 여러모로 황금기 시대의 빈티지한 본격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구성이므로 거창한 설정놀음이 아니라 심플한 논리 속에서 정답을 도출하는 고전 추리소설의 정수를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3위의 <엘리펀트 헤드>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특수설정 미스터리들을 읽으면서 종종 '잔룰'이 너무 많은 보드게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보통때와 달리 어느 상황에선 뭐가 달라지고, 다른 상황에선 원상복구된다는 식의 추가 설정들이 계속 밀어닥치니 나중에는 추리를 포기하고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고 심드렁하게 읽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최대한 심플하게 양식화된 상황 속에서 독자를 능동적으로 추리 과정에 참여시킨다. 지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당신도 범인을 맞출 수 있다.
1위 <가연물> - 요네자와 호노부
2위로 올린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와 거의 비슷한 이유로 올해의 1위작이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엑스레이로 찍은 것처럼 장식이 많은 의상을 벗기고, 덕지덕지 붙은 군살도 제거하고, 오로지 추리소설의 뼈대만 완벽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 '추리소설의 정수만 뽑아내는 작업'을 게이고의 작품보다 더 잘해냈다고 생각하기에 1위를 주었다. 주인공이 현역 경찰이므로 요코야마 히데오 스타일의 경찰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다섯 가지 사건은 전부 핵심 미스터리 하나씩을 감추고 있다. 그 베일을 깔끔한 논리와 화려한 추리로 벗겨 나가는 완전한 '본격 추리소설'이다. 작가가 본격 추리소설을 제대로 선보이기로 마음먹었다고 느낀 게 원래 청춘물 등에서 인간의 감정을 잘 다루는 걸로 정평이 난 스타일을 버리고 완전히 주인공의 감정을 배제하고 있다. 철저하게 드라이한 묘사로 사건에만 집중해 독자의 관심이 보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빠지는 걸 차단한다. 한마디로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공정하게 제시된 미스터리를 풀어보는 데만 집중하라, 는 태도이다. 심지어 해결 직전에 '독자에의 도전'처럼 각 단편들의 핵심 미스터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주기까지 하는데 모처럼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한 호노부의 작품을 보는 즐거움이 굉장했다. 책을 다 읽고 새삼 요네자와 호노부가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걸맞은 학원 미스터리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가 <개는 어디에>나 <보틀넥>, <추상오단장>처럼 동시대 젊은이들의 아픔을 담은 씁쓸한 청춘 미스터리로 진화했다. <인사이트 밀>이나 <부러진 용골>에서는 아마도 데뷔 전부터 즐겨 봤을 일본식 데스게임이나 판타지 애니메이션 같은 이색 장르와 추리소설의 결합을 시도했고, 본격 추리소설에 나오키상을 잘 안 주니까 나오키상이 잘 나오는 시대 미스터리로 방향을 틀어 <흑뢰성>으로 큰 상도 탔다. 가는 길마다 성공적이었고, 다양한 장르에서 쓰는 것마다 호평을 받았다. 특히 부침이 심한 이 업계에서 매년 훌륭한 작품을 뽑아내는 솜씨는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개인적으로 지난 20년간 최고작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영매탐정 조즈카 히스이>의 속편 <인버트>나 작년 1위 <방주>의 속편 <십계>가 둘 다 실망스러운 걸 보면 폼을 유지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매년 탁월하게 해내는 요네자와 호노부. 이쯤되면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이름 앞에 슬슬 네 글자를 붙여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G.O.A.T(Greatest Of All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