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별의 조각을 가지고 올게요
여름, 시작
아이리시스  2017/06/29 17:07

 

 

보리수열매와 체리를 먹던 지난달부터 여름은 이미 와 있었다. 이미 보름도 더 전에 복숭아와 자두를 먹기 시작했다. 여름은 이미 시작했고, 저런 제목을 쓸 필욘 없었는데, 신호탄이 필요하다. 지난 일 년 삼 개월은 노트북을 거의 켜지 않던 시간이었고 최근에서야 노트북을 켜 뭘 해보려 한다. 주로 기사 검색, 웹툰 보기, 미드 보기에서 다시 꺼지는 경우 많지만. 지난 해 늦은 봄부터 아홉 달 가까이 걸려 자격증 따고 보이는 것보다 목표한 것보다 훨씬 더 먼 꿈을 꾸었다.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삶의 인맥을 열고, 이제 몇 년 더하면 인생 절반을 함께 했다 말할 수 있을 오래 사귄 애인과 결혼하고. 그러고도 반 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안 행사에 불려다니고 원하던 시험은 문앞에서 낙방하고. 그와 동시에 평생의 분신이 될 아기가 찾아왔고, 복잡했고 어쩐지 억울했고 마음과 달리 몸은 한없이 가라앉고. 그렇게 몇 달이 더 흐르고 여전히 시간은 멈춰있고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 시간과 삶은 나를 이끌어주지 않는다.

 

북플은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 가볍고 간단한 기록이라 자주 접속했지만 책을 거의 사지 않았고 하지만 읽을 책은 손길 닿는 곳 어디에나 널려 있었으며, 정기검진을 다니기 시작하고 입덧이 시작되면서 매주 가던 도서관마저 끊었다. 이 순간에도 문자로 희망도서 도착알림을 차곡차곡 넣어주는 고마운 도서관이지만 빌려와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많은 신간들은 유독 남달랐던 애착과 지식욕을 반영하는 물질이고, 이제 그것들로 나를 온전히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은 시간,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다 집중력과 열정, 두 가지 모두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둘이라 생각했던 그러나 하나였던 어떤 일만 끝내면 돌아오겠다 생각한 알라딘 블로그에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이유가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7년이 넘도록 일상과 생각과 감정을 차곡차곡 쌓았던 보물창고를, 그렇게 잊었다.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욕심도 없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기록하므로. 그저 하던 일을 더 오래 버려둘 엄두가 나지 않을 뿐.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 자각했고, 흐르는 시간을 자유롭게 놓쳐버릴 용기가 없었을지도. 정신을 차려보니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며칠 후면 본격적인 여름과 함께 올해 하반기가 시작된다.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 말고, 이 시간의 결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기분은 착각이었을까. 지난 주말, 오랜만에 두 시간 넘게 달려 수목원을 찾았는데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거다. 여름이다, 무언가를 해야겠다, 이대로 시간이 나를 통과하도록 속수무책으로 둘 수는 없다, 는 생각을 한 것이.

 

아기가 간절한 친구는 뜨개질을 배운다며 필요한 거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나는 비타민D 결핍으로 핀잔 들으며 먹거리 검색한다. 시간이 생기면 편하게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는데, 일단 시작하면 성과를 내야하므로 여기서 뭘 더 저지르는 건 욕심 아닐까, 하지도 못할 거면서. 평정심과 건강을 지키며 간헐적으로 외국어 단어나 외우는 게 더 가치있는지도. 그러다보면 나는 결국 책 근처로 돌아오겠지. 몇 달 동안 빌려볼까 살까말까 하면서 망설이던 책들이 저녁에 온다. 오늘이 시작이면 좋겠다.

 

펼쳐볼 때마다 보잘 것 없는 서재에 대해 생각한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고르고 읽고 사모으는데 어째서 심야 이동도서관에 꽂힌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숨고 싶어지는지. 더 잘 고르고 더 잘 읽고싶다. 이 책 좋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정말 좋은 책을 골라 들고 싶게 하니까. 아주 작은 시간도 너무나 사소한 선택도 다 기록되고 있다는 무언의 감시. 기분 좋은 간섭. 내 세상엔 책이 전부가 아니지만 책을 빼놓고는 내 세상을 논할 수 없을 것. 심야. 이토록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시간에. 책.

 

 

이 책이 일종의 메타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을 당장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에 책을 읽어나가며 버거운 순간들이 있긴 했다. 심지어 마르케스의 저 작품을 실제로 읽더라도 흥미와 매력을 제대로 느낄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잊을 만하면 나오는 <미로 속의 장군> 줄거리와 인용문은 충분히 이 책을 덮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지한 대만의 독서가가 들려주는 독서讀書라는 행위에 대한 깊고 폭넓은 사유가 낯설면서도 매력적이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얕게는 (본인이) 책을 고르는 법과 읽는 법, 감상과 글쓰기에서 깊게는 각종 사유로 뻗어나가는 내용도 그렇지만, 이 시대 독서와 책 읽기, 책이라는 자체에 대해 이토록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고 신랄하게 적어나가는 사람이라니, 부러웠다. 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확신을 갖고 나아가는 편이 아니라 도중에 찾는 사람이라서. 사실 확신에 차 있는 듯 보이던 사람들도 정작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견고함을 다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 나아졌다. 무엇이. 어쩌면 영원히 원하는 확신을 쥘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행위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기분이 나아지는 것. 하면 행복한 일들. 되찾기를. 

 

그리고 언젠가, 읽어낸 모든 책은 버려지기를. 숨겨진, 글로 쓴 모든 순간이 지나가기를. 좋았던 추억이 슬픔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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