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가보지 못한 길


어떤 글을 쓸 때마다 그 글의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그저 가볍게 두드리는 별 것 아닌 글 하나라고 해도 그렇다. 중국 영화 [먼훗날 우리]의 리메이크 영화 [만약에 우리]에 대한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라고 고민을 해봤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꼭 해야 할 말이 그리 많지도 않은 묘한 영화였다. 어찌보면 원작에 충실한 영화이고, 한국 상황에 맞게 잘 만든 영화이기도 했다. 중국 원작과 달리 전형적인 한국 영화 같은 느낌이 강했다. 이걸 지난 번 글에 "세속적이고, 적당히 후려치고, 적당히 뭉개고, 적당히 빠져나가는" 이라고 표현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표현은 좀 많이 과했다. 내용은 익숙한데 전혀 같은 영화 같지 않고, 한국식으로 잘 바꿨다는 점은 리메이크를 잘 했다고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작의 그 처연하고 아련한 느낌을 이 영화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다. 그 지점에서 나는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영화라고 본다.


류뤄잉 감독의 영화 [먼훗날 우리]에 대한 글 "만약에 라는 잔인하고 부질없는 상상" 읽으러 가기: https://blog.aladin.co.kr/idolovepink/17070415


[먼훗날 우리]를 보고 쓴 글의 제목을 "만약에 라는 잔인하고 부질없는 상상" 이라고 썼었더라. 그런데 이 글도 똑같은 제목을 붙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만약에' 라는 상상은 잔인하고 부질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같은 제목을 다시 쓸 수는 없어서 조금 바꿨다. 


원작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린젠칭도 그리고 이 영화에서 구교환이 연기한 이은호도 모두 현재 시점에서 팡샤오샤오와 한정원을 향해 만약에 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샤오샤오도 정원도 아니라고 답한다. 원작에서는 이 부분의 분위기를 정말 잘 살렸다. 이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보면서 계속 내 젊은 시절 실패한 사랑의 기억을 떠올렸었다. 이 장면 덕분에 너무 감정적으로 흔들려 이런 저런 글들을 메모장에 잔뜩 적어 놓았었다. 이 영화에서는 이 장면에서 그렇게 슬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여전히 이 만약에 라는 질문이 가진 특유의 성질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냥 거기까지였다. 이어지는 두 남녀 주인공의 연기는 그 이상 더 감정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처음에 한번 보았을 때는 그걸 두 배우의 연기 탓으로 돌렸다. 확실히 한정원 역의 문가영의 연기는 뭔가 조금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구교환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괜찮았지만, 문가영 과의 합이 잘 맞는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건 원작의 저우동위와 징보란의 연기가 훨씬 더 자연스럽고 잘 어울린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암튼 처음에는 연기 때문에 그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감정을 잘 살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이 장면을 다시 찬찬히 돌려보고, 그리고 원작의 해당 장면을 다시 찾아본 후로 생각을 바꿨다. 이 우리나라 영화가 원작의 내용들을 충실히 잘 따라가는 것은 맞지만, 대부분 미묘하게 감정선이 다른데, 이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 두 사람은 훨씬 더 진지하고 절박한 느낌이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그런 절박함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화면의 구성이나 풍경도 원작 쪽이 훨씬 더 스산하고 쓸쓸했다. 


그리고 이건 두 남녀 주인공의 성격과 현재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작의 린젠칭과 한국영화의 이은호는 둘 모두 직접 만든 게임이 잘 풀려서 성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상태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좀 다르다.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잘 몰라서 린젠칭이 얼마나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은호는 정말 전형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 주인공은 훨씬 더 많이 다르다. 샤오샤오는 예측하기 어려운 통통 튀는 매력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속이 깊고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에 비해 한정원은 현실적인 인물인 점만 보이고 다른 매력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현재 시점에서 정원은 건축가가 되어서 은호에게 명함을 내민다. 하지만 현재 시점의 샤오샤오는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정확하게 직업을 밝히지도 않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옷차림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고 젠칭이 데려다 준 집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정원은 그렇지 않다. 옷차림도 세련되었고, 자신이 안정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직접 말하기도 한다. 이런 설정의 차이가 그 결정적인 장면에서의 감정선을 다르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영화의 해당 장면을 몇 번씩 돌려보다가 처음 원작을 봤을 때는 캐치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샤오샤오가 마치 젠칭의 내연녀 처럼 보일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샤오샤오가 젠칭의 호텔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두 사람이 렌터카를 빌려서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후에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이었다. 젠칭은 자신의 성공이 샤오샤오 덕분이었음을 밝히며 샤오샤오에게 '최우수 전 여친상'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샤오샤오는 그 말에 크게 웃으며 언제나 자신의 전 남친들은 모두 성공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젠칭의 성공은 확실히 샤오샤오 덕분이다. 그리고 샤오샤오는 그 전 연애에서도 불행했고, 젠칭과도 결국 행복하지 못했고, 이후로 10년 동안의 연애 역시 순탄치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어쨌든 '최우수 전 여친상' 이라니! 이런 개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재미있기도 하면서 단번에 샤오샤오를 보여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원작이 전체적으로 훨씬 더 절박하게 여러 상황들을 보여준다면, 한국 영화에서는 매번 그 절박함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샤오샤오와 젠칭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젠칭은 베이징에서 집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그걸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나온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남성을 만나 그 꿈을 이루려고 한다. 절박하다. 왜냐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베이징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원에게는 그런 절박함이 없다. 정원은 보육원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고시원에 잘 살고 있다. 고시원과 잘 살고 있다는 말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암튼 샤오샤오 만큼의 절박함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정원이 은호의 방에 들어가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샤오샤오는 아예 자신의 방을 빼고 남자친구와 동거하다가 남자친구와 갑자기 헤어지면서 갈 곳이 없어서 젠칭을 찾아간다. 하지만 정원은 남자친구와 헤어졌지만, 고시원에 방은 남아 있었다. 다만 그 방에 겨우 한 뼘도 안되는 햇빛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은호를 찾아와 동거를 시작한다. 저번 글에서도 이런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고 남성 판타지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썼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남녀가 유별한 상황에서 그렇게 손쉽게 여성이 남자 혼자 사는 작은 방에 들어갈 수 있나?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도? 이번 영화에서 정원은 좀 더 어이가 없었다. 샤오샤오는 정말 잘 곳이 없었지만, 정원은 여전히 고시원이 있었다. 그런데 햇볕을 이유로 사귀지도 않는 남자 방에 들어간다고? 이게 현실에서 설득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젠칭의 방은 정말 좁다. 도데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잘 알기 어렵게 복잡하게 작은 방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집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다. 정말 당시에 아니 심지어 지금도 베이징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은호의 방은 넓고 쾌적하다. 책상과 침대 외에도 공간이 넓다. 고향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서울에 그렇게 괜찮은 방을 제공해 줄 수 있나? 아무리 2008년 이었다고 해도 저 정도 방이면 월세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 물론 언덕길에 계단을 빙빙 돌아 올라가는 장면으로 보아 교통이 편리한 좋은 동네는 아니고, 방이 아주 좋은 것도 아닌 것은 맞다. 다만 젠칭에 비하면 은호가 덜 절박하게 보인다는 것. 그러니까 한국 영화는 여러 모로 계속 평이하고 무난한 느낌을 받는다.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대는 춘절이다. 류뤄잉 감독이 자신의 소설 [춘절 귀가]라는 작품을 영화로 만든 것이라 시작하는 장면도 춘절에 고향인 야오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마지막은 춘절 연휴가 끝나는 무렵 고향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둘이 처음으로 육체 관계를 맺는 것은 양력 1월 1일 새해이기는 하지만, 계절로는 겨울이다. 그러니까 흔히 연말연시라고 부르는 시기에서 음력 설인 춘절까지가 가장 중요한 시간대로 계속 반복된다. 한국 영화에서는 여름이다. 두 남녀가 처음 만나는 시기가 여름 휴가 시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현재 시점인 2024년 여름에 베트남 호치민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작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바꾼 것이다. 이 선택은 꽤나 괜찮은 것 같다. 흑백으로 시작하는 현재 시점의 꽤나 세련된 정장을 입은 정원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관객들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도 원작처럼 과거는 컬러 화면으로, 현재는 흑백 화면으로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서늘하고 차가운 느낌의 현재 시점 장면은 원작에 비해서는 분량이 제법 줄어들었다. 


과거 상황의 첫 장면은 버스 정류장이다. 원작에서 열차 풍경이 독특하고 좋았는데, 버스 장면은 좀 너무 뻔한 느낌이었다. 저 위에 링크를 걸어 놓은, 원작을 보고 쓴 글에서 과거 서울로 올라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상황을 길게 썼었다. 설연휴에 였고 폭설이 내려 버스를 17시간이나 탔었다. 하필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옆 자리(창가 자리)에 앉아 있어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었던 기억이었다. 이 영화에서 은호와 정원이 서울에서 고흥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하필 서로 옆 자리였다. 은호는 자신의 자리였던 창가 자리를 엉겁결에 정원에게 양보하는데, 이 부분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한 눈에 호감을 갖게 된 여성이라고 해도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저렇게 손쉽게 양보를 할까? 은호가 정원을 처음 보는 장면에서 정원은 빨간 우산을 펼쳐 들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빨간 우산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월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쩌면 문가영의 표정이 마츠 다카코와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이 영화는 과거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과 현재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나머지 주요 내용들은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육체 관계를 맺는 것도 남자친구의 외도를 깨닫고 12월 말일에서 1월 1일 새해로 넘어가는 밤 술을 진탕 마시고 놀다가 눈이 맞은 것으로 똑같다. 현재 시점에서 두 사람이 호텔 방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남성이 딸의 전화를 받고 영상통화를 방안 곳곳을 보여주는 장면도 똑같다. 과거 시점의 마지막, 여성이 남성을 떠나는 장면, 남성이 여성을 따라갔다가 전철을 따라 타지 않고 결국 헤어지는 장면도 똑같다.


원작에서 훨씬 큰 비중을 가졌던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 역할이 이 영화에서 많이 축소된 점은 좀 아쉽다. 원작이 춘절이라는 시간 배경에서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 즉 연로한 아버지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고 여자 주인공도 아주 잘 따르는 것으로, 그러니까 젠칭과의 사랑과는 별개로 젠칭의 아버지와의 인간관계라 형성되었던 것에 비해 이 영화의 정원은 은호의 아버지와 그 정도로 교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의 감동을 가져오려면 그 감동으로 연결해 줄 두 사람의 이야기도 따라서 만들었어야 했다.


음, 이래저래 주저리 주저리 영황에 대해 많이 떠들었다. 리메이크로서 나쁘지 않았다. 꽤나 괜찮은 지점들도 제법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를 원작이 훨씬 더 잘 살린 것에 비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즉, 계속 원작과 비교하다 보니 더 아쉬웠던 것이다. 비교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나았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여러가지 아쉬움 중에서도 한정원 역의 배우 문가영에게 아쉬움도 있다. 저우동위와 비교해 연기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좀 아쉬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영화를 두 번 보고 몇몇 장면들은 더 많이 돌려봤다. 그리고 원작을 다시 한 번 봤다. 쭉 이어서 보지는 않았고, 중간에 조금씩 건너 뛰면서 보기는 했지만, 저 위에서 강조했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여러차례 돌려서 보고 또 보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 영화 덕분에 원작의 해당 장면을 다시 본 것이 가장 좋았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