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웃
2월과 3월은 총회 시즌이다. 후원하고 있는 시민단체가 많고 그 중에 일부에서는 운영위원 등 역할을 맡고 있어서 총회 준비를 도와야 한다. 그리고 몇몇 협동조합에서는 이사와 감사 등을 맡아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이사를 맡고 있는 조합 두 곳에서는 올해 총회 준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이는 모두 돈으로 연결되지 않는 노동이지만, 많은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지난주와 이번주는 이런 일들로 많이 바빴다. 하루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와서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 총회 준비 일을 했다. 저녁에 또 회의가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 간단히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일을 했다. 새벽까지 일을 해도 맡은 일들을 다 끝낼 수가 없었다. 잠시, 아마 한 사십분 가량 졸다가 깼다. 의자를 여러개 붙여서 잠시 누웠는데 막상 누으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한동안 조용한 음악을 켜둔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좀 쉬다가 다시 일을 했다. 아침이 된 줄도 모르고 일을 하고 있는데 공동 사무실을 함께 쓰는 분이 출근하셨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세수도 하고 이를 닦았다. 다시 일에 몰두해 점심 무렵에야 급한 일 두 건 정도를 마무리했다. 그날 저녁에 또 회의가 있어서 고민했다. 집으로 가서 서너시간 쉬다가 돌아올까? 오가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어차피 할일은 남아 있으니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 운동을 하고 씻고 올까? 집에 일단 가면 피곤하니까 다시 나오기 싫어질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누워있다 나와야지 하다가 그냥 잠들어버려서, 회의 시간까지 깨지 못할 것 같기도 해서 선택지에서 지웠다. 운동도 몸을 쉬어주지 못해서 오히려 이런 날에 무리하면 다칠 것 같았다. 역시 삭제. 그냥 좀 쉬엄쉬엄 일을 하며 저녁까지 버텨야지 싶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한 십여년 전에는 며칠 연속 밤을 새워 일을 해도 괜찮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5일 동안 하루에 한두시간 정도씩만 쪽잠을 자고 일을 했던 일이다.
평소에도 밤에 일을 해야 집중이 잘 되어서 낮엔 주로 사람들을 만나고, 회의를 다니고 밤에 문서 작업을 하는 편이라, 하루나 이틀 정도 잠을 못 자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나이는 어쩔수가 없나보다. 예전에는 밤샘을 하면 집중력이 좀 떨어져도 몸의 피로는 좀 덜 느꼈는데, 요즘은 집중력은 오히려 괜찮은데, 몸의 피로를 확실히 느낀다. 암튼 너무 오래 책상 앞에 앉아 있어서 허리에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무선 이어폰을 챙겨 외투를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몇 군데 업무 통화를 할 일이 있어서 그 통화들을 몰아서 하면서 주변을 걸었다. 봄이지만 꽃샘추위는 여전해서 제법 쌀쌀했다. 무선 이어폰 덕분에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걸었다. 서너명과 한 시간 반 넘게 통화를 하면서 골목길들을 돌아다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동료 활동가가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얻어 먹으러 갔다. 새벽에 배가 고파서 컵라면 하나를 먹은 후로 첫 끼니였다. 사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밥을 먹고 돌아와 일 이야기를 좀 하다보니 회의 시간이 다 되었다. 회의는 길었다. 다뤄야 할 건은 많고 합의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금방 지쳤다. 나는 그때 이미 출근한지 36시간이 지나서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남은 집중력을 모두 짜내어 원활한 합의가 이뤄지도록 노력했다.
마라톤 회의를 마치고 몇몇 사람들이 배고프다고 음식을 사러 나갔다. 공식 회의 자리에서는 차마 나누지 못했던 날선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래서 뒤풀이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회의에서는 말하지 못했던,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중요하다. 회의가 늦게 끝나서 뒤풀이도 늦게 끝났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이었다. 남아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돌아가고 누군가가 나에게 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나눌 말도 많았고 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왜 내 몸은 하나 밖에 없을까? 내 몸을 복제해서 하나 더 만들어 일을 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는 인공지능에게 하루 종일 일을 시켜서 서너명이 할 일을 커버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글쎄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아직은 아무리 인공지능이 일을 잘 해도 혼자 완결지을 수 없다고 본다. 나도 이번에 많은 일을 맡아서 도움을 받아보고 싶었지만, 막상 써보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봐야 했다. 내 기준에서는 인공지능이 어설프게 만든 문서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빈 문서를 하나하나 채우는 것이 더 낫다 싶었다.
암튼 나를 붙잡았던 동료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48시간은 아니었고, 출근한지 한 44시간 정도 후에 퇴근이었다. 집에 오니 현관문 앞에 작은 종이 가방이 놓여있었고, 꽃 한송이와 떡 한 팩 그리고 작은 쪽지가 있었다. 뭐지? 이건 누가 보낸 걸까? 나에게 꽃을 보낼 사람은 전혀 없었다. 이건 아마 튤립인가? 꽃에 문외한이라 뭔지 알수 없었다. 일단 집으로 들어와서 쪽지를 열어봤다. 이번에 이 낡은 빌라 4층에 새로 이사온 이웃이라 적혀있었다. 그래서 떡을 돌린 거구나 하고 이해했는데, 그런데 꽃은 왜? 이 빌라가 워낙 낡아서 이번에 그 집이 내부 수리를 좀 오래 했던 것 같다. 공사 소음이 꽤 오래 들렸다. 그래서 일부러 떡을 돌린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꽃은 왜 돌렸을까?
어쨌거나 정성이 대단한 이웃이라 생각했다. 요즘 시대에, 이웃이랑 마주쳐도 인사도 잘 안 하는 시대에 떡과 함께 꽃을 돌리다니. 나는 이 집에 이사온 지 6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얼굴을 아는 곳이 아랫집 밖에 없다. 이삼년 전에 두 번이나 누수 문제가 생겨서 자주 소통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윗집과도 누수 문제로 소통했었는데, 그 집은 이후에 이사 나가고 새 이웃이 들어왔는데, 이 분들과는 아직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옆집은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살고 있는 어르신 부부이고, 늘 함께 지내는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성인이 된 자식들이 오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오가며 얼굴을 마주쳐서 인사는 나눴지만,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어서 얼굴이 기억이 안난다. 안그래도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나는 결코 이 분들을 알아볼 수 없다. 이번에 떡과 꽃을 돌린 이웃과 인사를 나눌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얼굴을 알아볼 정도의 사이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교롭게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꽃을 받았다. 하나는 작은 아이가 줬다. 2월 초 내 생일에 주려고 직접 만든 꽃이었다. 이 재료들을 뭐라 부르는 지 잘 모르겠지만, 털실과 철사 등을 활용한 것 같았다. 아이에게 받은 조화는 지금 사무실에 놓아뒀다. 이번에 받은 생화는 현관에 놓아뒀다. 덕분에 한동안 사무실을 오가며 선물 받은 꽃들을 보게 되겠네. 피곤하고 힘든 날 꽃 한 송이 덕분에 잠시 웃을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