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가보지 못한 길
어제 사무실에서 몇가지 일을 처리하다가 잠시 짬이 나서 여기 서재에 글을 조금 쓰고 있었다. 전날 내린 눈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린 시절 부산에서 눈을 거의 구경도 못 해보고 자란 것부터 군대에서 평생 본 눈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을 단 몇 시간만에 본 내용을 먼저 쓰기 시작했다.

군대 이야기를 짧게 쓰고 보니 그 옛날 혹한기 훈련에서 새벽에 자고 있던 A형 천막들이 거의 대부분 폭설에 주저앉아 급하게 철거하고 폭설에 고립되기 전에 산에서 내려가 부대로 복귀행군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추웠고, 눈이 너무 많이 내렸고, 너무 힘들었다. 그때 나는 기관총 사수였고, 기관총은 소총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기관총은 공용화기라서 행군시에 사수가 혼자 들지 않고 분대원들이 릴레이로 이어들게 되어 있다. 분대원들은 개인화기인 소총 외에도 또 예비총열과 탄통 등을 나눠들어야 한다. 나는 그날 너무 힘들었지만, 다른 분대원들(부사수, 탄약수 등)도 마찬가지로 힘들기에 그냥 혼자 기관총을 계속 메고 걸었었다. 그날의 기억들이 떠오르자 그것도 쓰고 싶었다. 그러다가 언제적 군대 얘기를 쓸데없이 쓰나 하는 생각에 그만두고 쓰던 걸 모두 지웠다.

그때쯤 지인이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해서 노트북을 덮었다. 결국 쓰려던 글은 쓰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북플에 접속해보니 과거 오늘 쓴 글에서 2012년에 쓴 글을 발견했다. 놀라웠다. 13년 전에 쓴 글도 눈에 대한 글이었고, 그 앞부분은 어제 내가 짧게 쓰다가 지운 내용과 완전히 똑같았다. 어린 시절 부산에서 자라서 거의 눈을 보지 못했던 것, 군대에서 정말 지겹도록 눈을 치웠던 것. 내용만 같을 뿐 아니라 문체와 분위기도 거의 같았다. 13년의 시간을 두고 쓴 글임에도 같은 사람이 본인의 경험을 쓴 것이니 내용도 글을 쓰는 방식도 같을 수 밖에 없구나. 그런데 아니 그래도 무려 13년이란 시간이 지나 그냥 떠오르는대로 쓴 글이 어떻게 거의 똑같을 수가 있을까.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어쩌면 그만큼 나는 발전이 없었다는 뜻일수도 있겠고, 늘 그렇게 변함없이 살았다는 뜻일수도 있겠다.

아, 게다가 짧게 군대에서 눈 치운 이야기를 쓴 후에 2010년 첫 출근날(아마도 1월 4일)에 내렸던 기록적인 폭설 이야기를 쓰려고 머리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2012년에 내가 쓴 글이 딱 그랬다. 그 내용이 다음에 나오더라. 이거 내가 과거에 쓴 글과 거의 완전히 같은 글을 13년의 시간차를 두고 다시 쓸 뻔 했다.

물론 중간부터는 내용이 달랐다. 당시는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아침에 작은 아이를 한 팔에 안고, 다른 손으로 큰 아이 손을 잡고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이 되어버린 비탈길이자 골목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다가 미끄러질 뻔하고 다칠 뻔한 내용들이었다. 작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큰 아이를 학교로 데려다주다가 교문 근처에서 결국 아이가 미끄러지면서 무릎을 찍고 울어버린 내용이었다. 나는 아이가 미끄러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올리며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으나 간발의 차로 아이는 먼저 무릎을 다쳤다. 우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간신히 달래어 학교에 들여보내고 나서 시간을 보니 이제 나는 일터에 지각할 상황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뿐 아니라 해마다 겨울마다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나이와 학년이 조금씩 바뀔 뿐 늘 그렇게 아이들을 안고 걸려서 데려다주고 데려오곤 했었다. 하루종일 해가 들지 않아 겨울 내내 녹지 않는 빙판길이자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그렇게 오르내렸었다.

이젠 아이들이 자랐고, 아이들과 함께 살지 않으니 그 내용으로 글을 쓸 일은 없어졌다. 그 시절 당시에는 참 힘들었을텐데 지금은 그저 그 때가 그립다. 아직 어렸던 귀여운 아이들이 다시 보고 싶지만, 그건 기억과 사진으로만 가능하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기억 어딘가에 묻어둔 그리운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다. 평생 그리워하는 일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 다시 그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제의 내가 중간 이후에 쓰려고 했던 눈에 대한 이야기를 무었이었을까? 하루가 지나니 그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아니 어렴풋이 한 두가지 키워드는 떠오르기는 하는데, 거기에 살을 붙여 이야기가 바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날이 춥고, 몸도 춥고, 마음도 춥다. 과연 이 겨울을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 겨울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오늘 잠 들었다가 내년 봄에 날이 풀릴 때쯤 깨어나면 안 될까? 제발 내일 눈을 뜨면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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