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누군가의 부고는 언제나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와 얼마나 친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하긴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 인물의 죽음에도 눈물이 나는데, 현실에서 내가 알던 누군가라면 슬프지 않을 수 없고, 아프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지. 어제 아침 갑자기 초대된 어느 단체 소통 방에서 누군가의 부고를 접했다. 20년이 훌쩍 넘은 어느 기억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쩌다 그와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귀여운 외모 덕분에 나보다 조금 어리다고 여겼지만 사실 동갑이었다. 일터에서의 일상과 당시의 가장 큰 이슈 등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와의 추억은 딱 그 한 순간 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순간들에 함께 있었을텐데, 다른 기억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그 잠깐 그와 나눈 대화가 크게 인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장례식장에 화환을 보낸 사진을 올렸다. 화환 뒤 스크린에 그의 사진이 보였다. 짧은 머리에 살이 쏙 빠진 얼굴. 내가 기억하던 그 귀여운 얼굴은 없었다. 급성 백혈병이었다고 했다. 최근 사진이었을까? 왜 더 예뻤던 시절의 사진을 쓰지 않고 굳이 저 사진을 썼을까? 영정 사진은 정말 이쁘게 나온 사진을 썼겠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마지막 모습은 그의 가장 아름다웠던 사진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와의 인연은 신입 활동가 교육을 함께 받은 교육 기수로 동기라고 엮인 것과 그 나이와 경력이 다양한 50여명의 사람들 중에서도 동갑이었다는 것. 그것 뿐이었다. 이후로 몇 번의 동기 모임과 동기 누군가의 경조사 모임 외에는 서로 만난 적도, 연락을 주고 받았던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이 너무 슬프고 아팠다. 죽음 이후에 무언가 있다고 믿은 적은 없지만, 이렇게 누군가 아는 이의 죽음을 마주하면 무언가 어떤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언젠가 내가 죽어서 그 곳에, 그게 대체 어떤 곳일지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어떤 곳에 간다면 거기서 그들을 만날 수 있기를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뭐 어쩌면 그곳이 있다고 해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의 20여년 전 귀여운 모습만 기억하고 있을텐데. 그리고 그는 지금 이렇게 늙어버린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서로 알아 볼 수는 없겠지. 그럼 굳이 사후에 존재하는 어떤 세계를 바랄 이유도 없겠구나 싶다. 어쩌면 종교는 그래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보고 싶은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이 종교를 만들어버린 것인지도.
휴가
해마다 휴가는 아이들과 부산으로 갔었다. 가끔 다른 곳을 들렀다가 부산으로 가기도 했다. 그래도 어쨌든 부산은 꼭 가야 했다. 여름에는 아버지 생신이 있기도 했고, 부산에는 유명한 해수욕장들이 있기도 하고, 명절에 바쁘게 쫓기는 일정이 아닌 느긋하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여름 휴가에 부산을 한번 다녀와야 했다. 아이들은 해마다 그랬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녀석들은 방학이 되면 내게 묻는다. 올해는 부산에 언제 가? 하고.
알바와 친구들 모임 등으로 방학임에도 바쁜 큰 아이와 방학이라 집에만 콕 박혀 있는 작은 아이 일정을 간신히 맞춰서 일정을 정했다. 올해는 여러 사정 상 아주 짧게 일정을 정했다. 비싸디 비싼 KTX 열차표를 왕복으로 예매하고, 부모님께 일정을 말씀 드렸다. 부모님은 양산에 살고 있는 동생네 가족들과도 휴가 일정을 맞췄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휴가가 다가오면서 결국 동생은 휴가를 받지 못했다고 알렸다. 그리고 휴가 직전에 엄마는 허리를 다치셨다. 차라리 표를 취소하고 이번에는 다른 곳에 놀러가거나 하라고 말씀하셨다. 본인이 밥도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할텐데, 부산에 와있는것이 부담스러우셨던 것 같다. 나는 위약금을 핑계로 그냥 가겠다고 했다. 밥은 사먹어도 되고, 내가 준비해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시라고 했다. 어차피 며칠 되지도 않고, 낮에는 애들하고 밖에 나가 놀다가 밥 사 먹고 들어올거라고 했다.
그런데 부산에 내려간 날부터 이틀째까지 비가 왔다. 이틀째에는 비가 제법 많이 왔다. 아이들은 나가기 싫어 했고, 어쩔수 없이 집에서 티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동생네 가족은 첫날 저녁에 왔다. 엄마가 허리를 다쳐 거동을 못한다고 매재가 전복죽을 한 솥을 끓여 가지고 왔다. 그날 저녁에는 매재가 준비한 전복죽을 온 가족이 먹었다. 전복도 엄청 많이 넣었고, 닭 삶은 육수로 죽을 끓인 건강식이었다. 간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아서 내 입맛에도 딱 맞았다. 같이 죽을 나눠 먹고 한동안 쉬다가 동생네 가족은 돌아갔다. 동생은 다음 날에도 일을 해야 했다. 큰 조카는 다른 일이 있다고 못 왔고, 작은 조카와 막내 조카를 거의 1년 만에 봤다. 녀석들은 겨우 1년 사이에 키가 많이 커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작은 조카와 우리 작은 아이는 동갑인데, 우리 아이가 몇 달 빨리 태어나서 부모님은 동갑이라도 손위니까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었다. 그래서 요 두 녀석은 오히려 데면데면했다. 묘한 관계였다. 작년까지는 우리 작은 아이가 작은 조카보다 키가 컸었는데, 이번에 보니 작은 조카 키가 조금 더 커 보였다. 작은 조카는 동생보다도 조금 더 컸다. 내 동생도 여성 치고 작은 키가 아닌데. 내가 설겆이를 하다가 그 사실을 말했는데, 동생은 몰랐다며, 그래도 아직은 내가 더 클텐데 하고 말했다. 그리고 남자 아이인 막내 조카도 키가 확 컸다. 우리 큰 아이보다는 아직 작았지만, 나머지 누나들 전부를 추월했다. 역시 아이들은 쑥쑥 자라는구나. 그만큼 나도 더 늙었다는 말이겠지만.
부산에 가니 부모님이 인터넷 업체를 변경하면서 무료로 디지털 티비를 받았다고 했다. 디지털 티비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리모콘에 넷플릭스 버튼이 있더라. 넷플릭스를 연결해 엄마에게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엄마는 허리가 아파 거실에 앉아 계시기가 힘들었다. 결국 나와 아이들이 넷플릭스로 영화와 드라마를 봤다. 이틀째에는 엄마가 허리 다치시기 전에 사놓은 반찬거리들이 상하기 전에 내가 두어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를 핑계로 하루종일 넷플릭스를 봤다. 이번에는 엄마도 허리가 조금은 나아져서 함께 앉아 보셨다. 나는 엄마와 함께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싶었다. 딱 그 나이 세대의 부모님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사셨는지 드라마를 통해 당시 시대를 추억 하셨으면 했다. 물론 제주도라는 공간적 배경이 달라 감정이입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내 짐작대로 엄마는 재미있어 하셨고, 허리 통증도 잊고 함께 드라마를 봤다. 그러나 드라마는 길었고, 한 3화 정도까지 보시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누으셨다. 나와 큰 아이는 이어서 몇 편을 더 봤다. 아이유는 예전 드라마나 영화에는 이지은으로 자신의 본명을 썼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아이유라는 덧이름이 자막에 나왔다. 아이유가 맡은 역할은 우는 연기가 절반 이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계속 울고 또 울었다. 아, 아이유의 셋째 아들 죽음 장면은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큰 아이를 안고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간신히 보았다.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가져간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았다.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아무거나 일본 영화 하나를 저장해두려고 했는데 마침 눈에 띈 것이 하마베 미나미 주연의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였다. 내용도 모르고 그냥 저장해두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본 것이다. 알고 보니 원작 만화가 있고, 애니메이션도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그럭저럭 볼 만했다. 하마베 미나미와 또 다른 여 주인공은 귀엽고 매력적이었다. 남자 주인공 두 명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연기도 제법 괜찮았다. 일본어에 익숙해지려고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계속 보는 중이라 그냥 선택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영화를 좋아하고 장차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권하는 영화가 바로 [어바웃 타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도 그랬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본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나는 [어바웃 타임]의 몇몇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쓰셨냐고 묻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언제든 자신의 특정한 과거로 돌아갔다가 언제든 현재로 돌아올 수 있으니 사실상 거의 무한한 시간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일텐데, 그 시간을 책을 읽는데 썼다는 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책을 읽다 말고 미뤄두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오늘부터는 정말 책을 꾸준히 계속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챙겨갔던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을 읽었다. SF 읽기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인데, 서로의 달이자 각자의 지구라는 설정이 정말 인상적이고 재미있었다. 얼른 읽고 인상적인 설정들을 정리해서 책 모임 소통방에 올리고 싶어졌다.
어제와 오늘은 휴일이지만, 밀린 일들을 해치우기 위해 사무실에 나왔다. 최근 롯데 자이언츠는 7연패를 당했고, 어제는 동기의 부고도 있었고, 내가 기다리고 있는 어떤 소식은 감감 무소식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기분이 축 쳐지고, 일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다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나 좀 식히러 나갔다가, 알라딘 중고 서점에 들러 책을 샀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책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정보라 작가는 [저주 토끼]를 읽은 후 책이 눈에 띌 때마다 사 모으고 있다. 아직 안 읽은 다른 책도 있는데, 이번에 같이 쭉 읽어야지. 그리고 [도쿄대학 살인사건]은 그냥 집어 들었는데, 책 날개에 비운의 천재 작가라는 소개를 보고 궁금해져서 샀다. 저자 소개글을 읽고 나서 데뷔작 [내 몸을 빌려 드릴까요]도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여기 매장에는 없었다. 여기 매장에 사토 아유코 작가의 책은 내가 구매한 이 [도쿄대학 살인사건] 하나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알라딘 앱을 열고 중고 책을 검색했다. 다른 매장 세 곳에 [내 몸을 빌려 드릴까요]가 있었다. 그중 상태가 최상인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잠시 고민했다. 배송료 2,500원을 내고 그냥 주문할 것인가, 아니면 한 두 권을 더 담아 2만원을 넘겨 배송료를 안 낼 것인가. 아, 이놈의 책 욕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기어코 해당 매장의 책 목록을 넘기며 관심 있는 책이 있는지 살폈다. 한참을 뒤지고 뒤져서 결국 겨우 2만원을 조금 넘긴 금액을 맞추고 책을 주문했다.
과연 나는 주말 중에 밀린 일들을 다 해치우고 이 책들을 읽을 수 있을까? 아니면 주문해놓은 책들이 올 때까지 결국 책에 손을 댈 여유를 만들지 못할 것인가? 얼른 일을 마칠 수 있으면 [도쿄대학 살인사건]을 먼저 시작하고 싶고, 만약 책이 올 때까지 책 읽을 여유가 없었다면 [내 몸을 빌려 드릴까요]를 먼저 시작하고 싶다. 둘 중 어떤 책을 먼저 시작할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일단 일을 먼저 마쳐야 한다. 아! 이렇게 쓰고 보니 또 일하기가 엄청 싫다. 그렇다. 언제나 일을 하기가 싫은 것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집중력.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일을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