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리고 어떤 기다림
간 밤엔 비가 왔다. 아침에 잠시 그쳤다가 다시 또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내리고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으면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제일 처음 생각나는 건, 담배 연기다. 아마 15년 쯤 전부터 약 10년 전까지 일했던 출판사에 있을 당시 기억이다. 처음 그 출판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 건물 5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엔 잡지 기자들이 다수였고, 단행본은 아직 없던 시절이라 나 혼자 단행본 일을 했었다. 그러다 잡지 비중을 줄이고 점점 단행본 중심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같은 건물 2층으로 사무실 규모를 줄여 이사했다. 원래 그 건물 1층과 지하에는 큰 인쇄소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2층 맨 안쪽 사무실 뒤쪽 유리문을 열면 건물 뒤쪽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 같은 아주 좁은 공간이 나온다. 인쇄소가 있던 시절에 여기에 큰 도르레가 걸려있어서 지하에서 찍은 책 더미를 주차장으로 끌어올렸다고 들었다.
그 뒷문 앞 아주 좁은 콘크리트 바닥 공간(이걸 베란다나 테라스라 부르기도 애매하고 다른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하겠으니, 그냥 좁은 공간이라 부르자.)은 골초인 사장이 흡연 공간으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 좁은 곳에서, 게다가 그 뒷문으로 가려면 자연스레 사장 책상 앞을 지나야 하는데, 일하다 말고 담배 피우러 가면서 대놓고 사장 앞으로 지나가길 원하는 노동자는 없지 않을까 싶다. 암튼 그래서 나는 그 좁은 공간에서 담배를 즐겨 피우지는 않았다. 간혹 사장이 없는 날에 이용하거나 비가 제법 와서 아예 밖에 나가기 곤란한 날에 거기서 담배를 피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문을 여닫는 공간을 제외하면 딱 두 사람, 억지로 서면 겨우 세 사람이 설 수 있는 그 공간에서 흡연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워댔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은 아마도 전날 제법 술을 많이 마신 후의 다음날 오후였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왔고, 제법 많이 왔다. 사장과 기자들은 오전에 회의를 하고 오후엔 자리에 없었다. 덕분에 나는 오후에 사장 눈치를 보지 않고 그 공간에서 천천히 담배를 음미했다. 빗소리와 함께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엔 아마도 폭우를 함께 맞으며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만난 작은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꼭 껴안고 있었던 어떤 여성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때 이미 삼십대 중반이 넘어섰던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순간들을 담배 연기로 태우고 또 태우며 줄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
두 번째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앞에 얘기한 그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 피해있을 당시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 미끄럼틀 쇠기둥의 질감이다. 맨들맨들하게 둥근 기둥이었지만 페인트 자국이라고 해야하나? 아주 작게 물방울 처럼 돋아오른 돌기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게 금속처럼 날카롭거나 딱딱하지는 않아서 기대어 있어도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살짝 돋아오른 만큼의 질감이 고스란히 젖은 내 반팔 셔츠를 통해 내 등으로 전해졌다.
아마 일요일 오후였고,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서너시쯤이 아니었을까? 왜 그랬는지 평소보다 일찍 돌아가겠다고 한 그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을 때는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오리라 예상도 못 해 우산을 챙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음, 아마도 일요일 아침 일찍 그가 내 자취방에 밑반찬 등을 싸온 날이었을 것이다. 같이 밥을 먹고 뒹굴거리다가 다음날 일정 때문에 일찍 가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버스 맨 뒷 자리에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산복도로를 휘휘 돌아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는 어지러운 도로를 지났다. 재잘재잘 그는 내게 끊임없이 어떤 이야기들을 했고 나는 웃으며 듣고 있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또 먼 거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그가 사는 동네에 도착해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커피숍에 앉았었다. 한참 떠들다고 이젠 들어가야 한다고 그가 일어섰고, 나는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함께 골목을 걸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그렇게 짧은 순간 갑자기 그렇게 많이 비가 그렇게 사정없이 쏟아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버린 우리는 손을 잡고 뛰었는데, 그의 집까지는 골목을 따라 한참을 더 가야했다. 중간에 만난 작은 놀이터를 보자 그가 내 손을 당겨 미끄럼틀 아래로 이끌었고, 완전히 젖은 채 덜덜 떨고 있던 그를 꼭 끌어안아줬다.
그 미끄럼틀 아래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비가 많이 잦아든 후에 가족들 몰래 그의 집에 살금살금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그의 남동생 옷을 빌려 입었던 것은 기억난다.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드디어 다 읽었다. 몇 번째 시도인지, 몇 년만인지는 기억나지도 않고 따지기 어려울 것 같다. 적어도 10년 가까이 되었으리라 하고 막연하게 추정해 볼 뿐. 늘 앞부분은 흥미롭게 읽었다. 포기했다가 다시 시도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앞부분은 계속 기억에 남아있어서 더 쉽게 읽히기도 했다. 마치 성문기본영어나 수학의 정석 같은 기본 참고서들이 책의 앞쪽만 공부한 흔적이 가득하고 중간 이후로는 깨끗한데,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고 또 맨 앞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매번 그렇게 앞부분을 가볍게 시작했다가 뒷부분에서 다시 책을 내던지고 말았다.
늘 막혔던 곳은 세번째 수기의 뒷부분이었다. 왜 이 부분을 읽어서 뒤로 넘어가는 것이 내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 다 읽어보니 그 즈음에서 이미 이야기는 거의 끝나있었다. 마지막은 후기로 맨 앞의 서문을 쓴 가상의 인물이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글이었다. 겨우 이 분량을 다 못 읽어서 그 긴 시간 이 책을 마음 한 켠에 계속 쌓아두고 있었던 것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에 소설을 끝내고, 그 뒤에 수록된 짧은 [직소]도 얼른 읽어버리고 번역자가 쓴 작품해설 부분을 꼼꼼하게 읽으며 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다자이 오사무, 본명 쓰시마 슈지. 아오모리 현 쓰가루의 부유한 집안 11명의 자녀 중 열번째로 태어난 사람. 세심하고 예민했으며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공부 머리는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런 사람이 서른 아홉살이라는 아직 채 마흔도 되기 전에 다섯번째 자살시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 이 소설 [인간 실격]은 쓰다가 죽은 미완의 유작 [굿바이]를 제외하면 마직막 작품으로 실제적인 유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요한 경험들이 많이 투영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본문과 뒤쪽 작품해설에 계속 등장하는 정사(情死)라는 단어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워 사전을 찾아봤다.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함˝이라고 나왔다. 소설 속 요조와 쓰네코의 자살시도는 이 사전 속 뜻이라고 보기는 살짝 어렵다고 느낀다. 분명 어떤 의미로든 사랑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함께 자살을 시도했겠지. 하지만 그 자살의 이유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쓰네코는 남편일을 비롯해 주점에서의 생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수기의 주인공 유지 역시 쓰네코를 향한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여러 이유가 있었다.
작가의 삶에서 시도한 두번째와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자살 시도 역시 단순히 저 사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똑같다. 작품해설에서 번역자 김춘미 선생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듯이 두번째 시도는 쓰시마 가문에서 내쫓긴 것 처럼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감정과 그 원인이 된 여성이 주 원인이었을 것이고, 앞서 첫 자살시도의 원인이었을 개인적인, 사회적인 이유들 역시 여전히 유효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때 함께 자살을 시도했던 여성은 안지 얼마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네번째 시도는 두번째 자살시도에 원인을 제공했던, 그리고 자신을 정신병원에 넣어버려서 또 한번 배신감을 느꼈을 아내 하쓰야와 함께였다. 이 두 건에서 사랑을 주요 이유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끝내 성공해버려서 마지막 시도가 되어버린 다섯번째는 그 이면에 사전의 뜻이 어느 정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함께 죽은 야마자키 도미에 라는 여성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작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곁을 지킨 사람이라는 문구 외에 다른 설명이 없다.
어쨌거나 총 다섯번의 자살 시도 중 세 번을 여성과 함께 시도했고, 그 모두 여성은 죽었다. 마지막엔 함께 죽었으니, 그 앞의 두 번은 모두 여성만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냥 단순히 이 사실만 접했다면 어느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이야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이 글을 폰으로 두드리고 있었는데, 이제 거의 도착했다고 한다. 감기 몸살 기운에 썩 몸이 좋지 않으니 저녁을 간단히 먹고 가볍게 차를 마실 예정이다. 막걸리에 파전이 땡기는 날이지만, 참아야지.
아, 원래는 길거리 농성장 텐트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잔 이야기도 쓰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