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답안지를 보건대 상당히 주어진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앎을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이란 우선 그렇게 편지를 따로 써서 주장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물론 학생의 앎이 대단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앎이란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학생의 경우처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게끔 이끄는 것도 앎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그래서 자신의 '눈'을 흐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지요."
4학년 2학기, 영화사 수업에서 만난 강사가 내게 던진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 과목 성적이 낮게 나와서 분한 마음에 메일을 보냈더니 내게 돌아온 답이 저랬다. 그리고, 족히 A5 다섯 장은 되었을 긴 편지가 시작되었다. 그 장문의 편지에서, 내 답안의 문제와 글쓰기의 한계를 그는 백일하에 알몸 그대로 드러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그 편지를 보여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나무람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망연자실했다. 처음에는 다소 분하고 억울한 감정도 없지 않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본 그 글은 정연했고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내 속살을 정확하게 헤집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장성한 나는 쓰게 웃었을 뿐이다. 그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훈계다운 훈계를 들었던 것이다. 선생다운 선생이 내리는 매는 매웠고, 매운 만큼 절절했다. 20대 중반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 오류와 허영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쩌면, 저 글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나란 사람이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게 말이다. 그것 말고도, 앎 자체가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때로 어떤 앎은 '알지 못하는 것'(무지)보다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다른 누군가의 허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오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로지 그의 글만으로 내가 학문의 길을 벗어던진 건 물론 아니었다. 공부를 하기에는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능력도 턱없이 모자랐다. 어찌되었든, 공부에 대한 꿈을 접는 데 그의 글은 한 1퍼센트쯤은 기여했다. 그는 편지 말에서, 좋은 학자적 자질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띄운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 글(시험 답안지, 중간 리포트, 항의성 메일) 어디에 학자적 자질이 묻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자 지닌 얼마 안 되는 학자적 자질을 버린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이 어쩌면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저 말을 내 가슴에 새겨두며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나, 적어도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을 성찰하는 데 게으름 부리지 않으려 한다. 오랜만에 들취본 그의 편지는 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쓰는 지혜와 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