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뜰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크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뜰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 . . 고등국어(상)에서 김용택, <그 여자네 집>
내 나이 스무 살이었던가. 그해 겨울에 나도 저 사람처럼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염없이. 길에 쌓인 눈을 밟고 또 밟으며,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돌을 차고 또 차며. 그 집 문 앞에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끝내 나오지 않던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그 집 대문 문고리에 내 목도리를 둘러주고 왔다. 내가 왔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난 하얗게 밤을 새우며 그녀를 기다리진 못했다.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그녀의 어깨 위에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내려앉을 정도로 나의 사랑은 깊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안에는 정말 많은 ‘내’가 들어앉아 있어서 온전히 나를 내놓지 못하곤 했다. 또한, 상대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나 역시도 금세 내 마음을 거두기 일쑤였다.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대개 그랬다. 조금 서툴고 미련스럽지만, 끝까지 기다리고 온전히 내어주지 않는 나의 사랑. 상대가 내게 줄 것을 미리 따져보고 내가 얼마나 줄 것일지를 가늠하기 바빴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달빛같이 숨가쁘고 그윽하게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영혼은 내 젊은 날의 후회다. 청춘의 시간을 지나가면서 내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