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세계에서 놀림을 받는 것처럼 심각한 ‘사회 문제’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문제가 있는 아이를 놀린다. 그리고 그 문제는 종종 남과, 나머지 대부분의 아이들과 같지 않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뿌루퉁해진 얼굴로 “애들이 놀려”하면서 아이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처럼 심한 인습주의자, 순응주의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남과 같지 않다는 것은 흉거리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 한 편의 동화가 나의 이런 고민을 속시원히 풀어주었다.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비룡소).
소피는 확실히 처음부터 좀 다른 아이였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에 오줌을 쌌거나, 아니면 좀 안아줬으면 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난 소피는 아니었다.” 소피가 우는 것은 어른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옷을 입혀 놓았기 때문이다. 말을 배울 때에도 소피는 “똑똑한 원숭이”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저 눈, 코, 입” 하고 따라하지 않고 대신, “소매, 깃, 단추, 주름...” 하고 말했다. 이런 소피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소피는 발은 분명히 두 개인데 왜 사람들은 똑같은 구두 두 짝을, 같은 색깔의 양말 두 짝을 신는지를 몰랐다....” 이런 소피가 손가락 열 개에 다 다른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 이렇게 다 “이름이 다르니까.” 이렇게 옷차림에 관해서 좀 독특한 생각을 가진 소피는 당연히 학교에서 아이들의 놀림감이다.
양말이나 신발을 짝짝이로 신는 것은 보통이고 필요하다면 아빠의 와이셔츠나 질질 끌리는 엄마의 치마도 서슴지 않고 입는다. 한꺼번에 두 개 이상의 치마나 벨트를 착용하거나, 세 개 이상의 목걸이나 금속 벨트 혹은 스카프를 두루는 등 담임 선생님이 “사육제 차림”이라고 부르는 옷차림을 해야 소피는 “옷을 입은 거 같은 기분”이다. 괴상한 옷차림 때문에 소피는 담인 선생님으로부터 경고 편지를 받아오고, 소피의 부모는 아이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여러 겹으로 옷을 입느냐고. 혹은 내일은 무슨 옷을 입고 갈 거냐고. 소피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침만 되면 뭘 입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다 입고 가는 거예요.” 혹은 “아빠는! 내가 언제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 보셨어요? 내일 아침에 가봐야지요. 바람이 불지, 해가 날지 모르잖아요. 오늘밤 구름도 좀 봐야 하고, 내 목소리랑 눈빛도 좀 고려해봐야 되구요.”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좀 열심히 나타내고 싶을 때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시를 쓰는 것처럼 옷을 입는 거예요. 내 몸은 종이구요, 두 손은 만년필, 두 눈은 영감의 창이에요, 모자는 느낌표구요, 스카프는 쉼표, 레이스는 말줄임표예요.” 뿐만 아니다. 어떤 날은 잠옷을 입고 학교에 가기도 한다. 물론 소피에게는 나름대로 상당한 이유가 있다. “‘밤’의 한자락을, 자기 침대의 한켠을 ‘낮’ 속으로 가지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피는 자신의 옷차림이 ‘누구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반문한다. “아빠, 그게 나쁜 거예요?”
학교에서 경고장까지 받아오는 별난 아이의 너무나도 간단하고 본질적인 이런 질문에 좋은 대답을 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소피의 부모는 그 많지 않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담임 선생님께 이런 답장을 썼다. “우리 소피의 옷차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건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겉장만 보고 책을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소피는 학업 성적도 우수하고 주의력도 깊은 편이면 예의바르고, 사회성에도 문제가 없다는 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피는 전혀 남을 방해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옷차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육’이란 ‘창의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점에 선생님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하며....”
그렇다. 창의성이다. 문제는. 이렇게 멋진 대답을 할 수 있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소피 같은 아이가 창의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도 바야흐로 창의성이 문제다, 라고 부르짖고 있다. 창의성을 죽이는 교육만 받고 자란 어른들이 개혁을 부르짖으며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운다. 학교 안팎의 교육이 여전히 창의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는 걸 방관하면서, 수능 시험에서 언어가 어려지고 논술 시험의 비중이 높아지자 거기에 발맞추어 유아에서부터 수험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프로그램의 초점은 창의성에 맞춰지고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창의성 과목’은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교사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아무한테서도 ‘배우지 않았던’ 이 과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교사들이 당황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제쯤이면 우리가, 아이들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다는 굳은 믿음에서 풀려나 아이들이 제가 원하는 것을 저 혼자 터득하도록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게 될까. 창의성도 무조건 ‘교육’해야 한다는 그 생각에서.
소피의 옷 입는 방식은 정말 엉뚱하고 지나치다. 그리고 그 지나침을 인내하는 소피 부모의 태도는 훌륭하다. 소피의 행동을 교정하려고 하기 전에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소피를 충분히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소피는 괴팍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가 아니다. 상심한 부모가 “내일, 새로 산 치마랑, 블라우스 입고, 양쪽 똑같은 스타킹 신고, 신발도 짝짝이로 신지 말고 그렇게만 하고 학교 갈 수 있니?”하고 부탁하자 부모님을 속상하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 얌전한 여학생의 옷차림을 하고 등교한다. 스물일곱 개의 리본을 단 스물일곱 가닥으로 땋은 머리, 얼굴에 갖다 붙인 금색, 은색 별만 빼고.
반 아이들이 이상한 장신구를 달고 오는 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자 소피가 자기 반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고 판단한 교사가 “학교에서는 소피가 퍼뜨리고 있는, 옷을 괴상하게 입는 전염병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조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경고성 편지를 교장 선생님의 사인까지 넣어서 소피 부모님께 보낸다. 이제, 소피의 엄마 아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세 가지뿐이다. 1) 전학을 시킨다. 2) 평일에는 하루에 세 번, 일요일에는 하루에 여섯 번 소피에게 잔소리를 한다. 3) 심리 치료사에게 보인다. 소피의 부모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고 싶고 아주 조그만 부분 하나에서만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소피의 이야기를 듣고 “소피는 용감하고 총명하고 득특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그리고 아주 귀여운 아이죠.”라고 진단서를 써주는 심리 치료사 역시 소피의 편이다.
어느 일요일 산책길에서 만난 신문기자에게 소피는 숄을 두르면 “할머니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고” 터번을 쓰면 “알리바바”가 떠오르고, “걸어다니면 찰랑찰랑거리는” 예쁜 소리를 내는 세 개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감동한 그는, 곧 ‘소피의 패션’이란 제목하에 “열 살 날 소녀 소피는 추억과 사랑과 음악과 시로 옷을 차려입는다. 이 아이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나갈 것인가”라는 기사를 써낸다. 담임 선생님은 이 기사를 오려 사진과 함께 학교 게시판에 붙이고, 아이들은 저마다 괴상한 차림을 하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지나자 청바지를 입고 오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드디어 선생님까지 널따란 통바지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고 학교에 오신다. “그 다음날, 소피는 주름치마와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단화를 신고..... 아무것도 더 걸치지 않고 그렇게 학교에 갔다.”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다.
. . . 최윤정,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문학과지성사)에서
좋은 부모가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좋은 부모는 무릇 좋은 인간을 전제로 한다. 좋은 인간이 되지 않고선 절대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물론, 좋은 인간이라고 다 좋은 부모가 되란 법은 없다. 좋은 부모는 우선 좋은 인간이어야 하고, 거기에 더해 또 다른 무언가를 갖춰야 한다.
나는 앞의 짧은 단락에서 ‘좋은’이란 형용사를 무려 8번이나 사용했다. 과연 ‘좋은’이 지칭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 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쓰인다. 내가 저 말에 담아 쓰는 의미는, 어떤 도덕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좋다’라는 것이 인품, 됨됨이를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음’이란 대개 사람을 대하는 어떤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는 태도. 하여, 그 사람의 깊은 상처와 그늘을 어루만지는 태도. 그게 좋은 사람이다. 다른 이의 그늘에 머무를 줄 알고, 그 그늘을 가만히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당연히 ‘다름’에 대해서 신경질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낯선 존재들에게 날선 눈초리를 보내지만, 그런 사람은 으레 낯선 존재들과 마주하기를 꺼리지 않고, 또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애쓴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관용하기란 좀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회는 범죄자는 간혹 용서하지만, 몽상가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몽상가란 다른 사람이며, 이상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존재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난 열린 사람이 좋고, 또 열린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진정 그렇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에는 보통 어떤 오해와 착각이 뒤따른다. 당연한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내 밖의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거리 때문에 언제나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그것까지도 그러안고 가야 한다. 당신에게로, 또 다른 나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