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부
주술의 기운 가득한 세계속에서 서(序)장에서는 헤매었지만, 강렬한 문장들 속에서 어느 순간 아! 하고 알아챘습니다. 이 책은 아주 찐득찐득한 독서감을 줄 거라는 걸요. 순순히 읽히는 책은 되지 않을 거란 걸요. 얼마나 거대한 분노와 미움이 있어야만 이렇게 집요하고 주도면밀하고 처절한 복수를 감행할 수 있을까요. 왠지 뒷부분에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에 압도되는 건 아닐련지 걱정이 듭니다.
2부
'복수는 사건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이 복수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흥미진진합니다. 악을 선택한 주인공이라지만, 은정 앞에서는 왠지 위악을 연기하는 듯 합니다. 애써 애착을 부정하고 손안에서 놀아나게끔 하는 언사 속에서도 주인공의 연대감과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은정이 짊어진 고난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지. 마치 칠흑같은 이 이야기 속의 어둠들을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날카로운 흑요석 같습니다.
3부
3부의 문을 여니 복수의 늪으로 뛰어드는 주희(혹은 연린)가 눈에 들어옵니다. 심리적 복수는 성에 차지 않아 물리적 복수의 단계에서 한발짝 더 나아갑니다 주희는 이걸 예상했을까요? 예측을 벗어난 주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보입니다. 복수의 길을 교활한 뱀의 눈으로 바라보느 두사람. 그리고 지긋이 이를 살피는 초월자. 초월자의 역할은 도대체 어떤 걸까요? 주술의 힘을 빌었다지만 초월자 역시 이에 방조한, 눈감은 참여가 있었을 터. 잊을만하면 소환되는 초월자의 생각이 저는 가장 궁금합니다.
4부
4부에서 잘 벼린 결기와 복수의 폭주는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전쟁으로 치면 공세종말점, 로켓으로 치면 1단 부스터를 떼어내야 할 때인 듯 싶습니다. 이 변화에 주희(혹은 연린)은 혼란스럽습니다. 은정은 오히려 독자성을 획득하며 자신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원래 무슨 일이든 오리지널은 오히려 유연하고, 이를 전수받은 전수자는 방향을 바꿀 재간도 의지도 없는 법이니까요. 들끓는 에너지는 어디론지 사라져서인지 4부는 하강의 이미지가 가득합니다.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삶도 내려가는 그 하강들이 왠지 쓸쓸하기만 하네요.
5부
악 또는 복수의 연대기라고 이름 붙이면 이 이야기에 답할 수 있을까요. 이 잔인하기까지 한 초월자의 회심의 한 방에 주희(혹은 연린)은 복수의 대상마저 흔들립니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 한 방이 아니었다는 게 5부 이야기의 핵심이었습니다. 아! 이 질긴 주술의 끈은 아마 이 세대를 뛰어 넘으려나 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잉태자에게 피잉태자는 1/2의 유전자만 물려받은 외부 개체이기 때문에 외부물질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면역체계를 임시로 우회할 수 있도록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진 아주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죠. 마치 그런 종족 보존의 굴레를 상징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체 감상
망치로 뒷통수를 함께 얻어맞은 1인으로서 리뷰를 마치게 됩니다. 주희와 은정의 관계는 과연 사랑일까요 복수일까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일을 이 소설은 다룹니다. 덕분에 제 세계는 독서 전과 독서 후가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질주하는 문장에서도, 순도 높은 악의에서도, 초월자의 마지막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어퍼컷에서도 이 매혹적인 낯섬이 좋았습니다. 이 작가를 왠지 앞으로도 오래 기억할것만 같은 생각입니다. 복수의 연대기(Saga)가 담긴 찐한 핏빛 칵테일을 잘 즐겼으니 한 숨 쉬고 현실로 돌아와야할 시간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