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때 한글을 떼자마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림일기라는 형식으로 위에는 그림을 그리고 아래는 글을 쓰는 형식이었는데, 문구점에서 파는 노트를 사서 쓰지 않고 줄 없는 A4크기의 작은 스케치북을 사서 줄을 그어 그림일기장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매일 엄마에게 검사를 받아야 했다. 직장에 다니시던 엄마는 그렇게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엿보시기도 하고 글자가 틀리면 고쳐주시기도 했다. 아주 옛날 일이다.
이탈리아 작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의 주인공은 마흔 세살 여자 발레리아이다. 은행에 다니는 남편과 대학에 다니는 아들, 딸을 두었고 그녀 역시 직장에 다니면서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 중년 여성이다.
어느 날 우연히 일기장을 구입하게 되고, 식구들 몰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직장과 집안 일, 자식들 뒤치닥거리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상이 열린다.
처음엔 가족들 모르게 비밀스런 일기를 쓴다는 것이 쓸데 없는 짓 같아 망설이기도 하고, 안그래도 쪼개쓰고 있는 시간만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몰래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온갖 걱정을 해가며 시작하지만 그래도 일기를 쓰면서 그동안 한켠에 치워두고 있던 자의식을 발견하게 되고 가족과의 갈등, 집과 직장 외에 여유라곤 없는 일상을 버텨나가는데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일기를 써나가는 과정은 발레리아가 처음 자기 삶을 자기 중심으로 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어떤 면에서 노예의 삶은 나의 무기이자 나의 희생을 빛내는 후광이었다. (35)
자기의 삶이 노예의 삶과 다름없다고 각성하면서 그게 자기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는 용기를 덮는 후광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아간다.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노예의 삶을 기꺼이 살아오도록 명분을 제공한 아들과 딸이 이제 각자의 삶을 살고자 한발짝 내딜때마나 발레리아는 심하게 반대의 반응을 한다.
나 (발레리아)는 무시하는 말투로 이제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으니 그동안 엄마 아빠가 너를 위해서 한 일을 고마워하라고 했다. (184)
그러자 딸은 대답한다.
"솔직히 말할까요, 엄마? 돈 버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돈 벌기 힘들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처음 취업했을 때는 두려웠어요.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봐 겁이 났죠." (184)
딸의 성취에 대해 반발하는 엄마의 심리는 무엇일까. 이제 엄마인 자기의 역할은 끝났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일까.
발레리아는 정신을 잃었냐, 배은망덕하기 까지 하다며 딸을 비난한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때가 전후 시대인 1950년대임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실제로 남자들은 자립심이 강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경력이 뛰어난 여자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더라도 적어도 결혼하려 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너도 막상 첫아이를 품에 안으면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거나 아이가 배고파하고 생존을 위해서 엄마를 필요로 하면 법정에서 뿌듯함을 맛보겠다고 (딸은 법을 전공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아이를 나 몰라라 하지는 못할 거라고 했다. (189)
법을 전공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자기도 뛰어난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는 딸에 대한 엄마 발레리아의 대답이다.
아들마저 발레리아 맘에 전혀 들지 않는 여자 아이와 사귀며 결혼하여 집을 떠나겠다고 하자 발레리아는 질색하며 좌절한다. 믿었던 아들마저 이제 자기 품을 떠난다고 한다.
남편과의 사이도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런 공감대가 없다.
그는 나를 보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는 아이들과 마리나 (아들의 여자친구)와 칸토니 (딸의 남자친구)와 평생토록 설거지한 산더미 같은 접시들과 남편이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과 내가 내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과 어젯밤처럼 냄비에서 나오는 김 때문에 보이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끓인 수프가 있었다. (323)
마음 속의 생각을 가끔 털어놓는 대상인 엄마에게도 공감과 위안을 얻지 못하고 세대차이를 느낄뿐, 발레리아는 자신의 실체는 없는 것 같다는 정신적 공허함을 느낀다.
나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중 하나는 전쟁과 함께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전쟁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은 그 두 세계가 내 안에서 충돌하며 신음하고 있다. 종종 내 자신이 실체가 없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 충돌의 통로일 뿐일지도 모른다. (410)
얼마전 부터 시작된 직장 상사와의 은밀한 관계는 발레리아를 더욱 갈등에 빠뜨리고 그와의 비밀의 여행을 앞두고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일지 고민한다. 발레리아 자신에게도 남자에게도 자기 삶에서의 돌파구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더 늦기 전에 행복해지고 싶다. (420)
과연 발레리아가 선택한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선택 맞을까?
저자 알바 데 세스페데스는 1911년에 태어나 1997년에 세상을 떠난 쿠바계 이탈리아 작가이다. 아버지가 쿠바사람, 어머니가 이탈리아사람. 할아버지는 쿠바 초대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이른 나이에 결혼과 이혼을 하였고 다양한 문학 활동, 정치 활동을 하였다. 오랫동안 그녀의 작품이 잊혀져있다가 엘레나 페란테라는 작가가 자기 소설에서 세스페데스를 언급함으로써 뒤늦게 재조명되었다.
70여년이 지난 지금 그당시 발레리아의 딜레마의 일부는 달라졌지만 일부는 여전히 여성의 삶속에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딜레마의 핵심은 자기 삶에서 자기가 빠진 노예의 삶을 살면서, 거기에 희생이라는 후광을 씌운다는 것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자기 중심의 삶으로 돌아오는 시작이다. 발레리아가 마지막에 한 결단과 행동, 그렇게 맺은 작가의 의도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