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폐지 압축 공장에서 35년 째 일해온 한탸가 자신의 삶과 고독을 회고하며 진행된다.
한탸는 폐지로 압축될 책들 속에서 철학, 문학, 예술을 발견하고 몰래 읽으며 뜻밖의 지적 세계를 쌓아가는 기회로 만든다. 하지만 그의 내면적 풍요로움은 외부 세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점점 더 고립감을 느낀다.
자동화 공장이 도입되어 한탸의 작업 방식과 존재가 위협받는 시간이 왔고 자신의 삶이 더 이상 그 의미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그는 결국 자신과 책이 함께 압축되어 하나가 되는 결말을 택한다.
첫문장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 소설 내내 자주 등장한다. 그는 폐지 압축하는 일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이어나간다.
엄마가 죽었을때 내 안의 모든 것이 울었지만 막상 내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화장터를 나서자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어여쁜 모습으로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십 년째 지하실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해온 터라 나는 습관처럼 화장터의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 보았다. 책들을 두고 하는 일을 거기서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신 네 구를 태운 참이었고 그 가운데 엄마는 세번째였다. 나는 꼼짝도 않고서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를 목격하고 있었다. (24)
나(한탸)는 은퇴후 자신과 압축기가 머무를 장소를 찾다가 외삼촌을 찾아간다. 기관사 일을 하다 은퇴한 외삼촌은 자기 정원에 오래된 작은 기관차를 갖다 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기관차 놀이를 하며 즐거워 하고 있었다. 그리로 다가가지만 아무도 한탸를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와서 합류하라고 부르는 사람도, 한잔하고 싶은지 내게 묻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놀이에 빠져 얼이 나가 있었다. 놀이라고 해봐야 그들이 평생토록 애정을 쏟았던 일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나는 카인처럼 이마에 표적을 지닌 채 걸어다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떠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나를 불러줄 수도 있었으련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또 한번 뒤돌아보았다.
문가에 서있으려니 외삼촌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외삼촌은 줄곧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나무들 사이에서 갈 곳 몰라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조종 장치에서 손을 들어 묘한 몸짓으로 그저 대기를 진동시키려는 듯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어둠 속에서 그의 인사에 답했다. 서로 엇갈리는 방향으로 떠나는 두 열차에 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모습이랄까. (32)
왜 그는 자기 이마에 카인처럼 표적을 지녔다고 생각했을까. 오랫 동안 고립되어 살아온 사람은 아마 자기 몸 어딘가에 카인의 표적 같은 것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과 자기가 잘 섞이지 못하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나 보다. 카인의 표적이라면 원죄 같은 것, 자기 힘으로 없앨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일테니까.
그의 철학과 종교에 대한 지식은 예수와 노자를 비교하여 비유한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전진'이라는 뜻)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후퇴'라는 뜻)이라고. 비유는 그것이 다가 아니다.
예수에게서는 상징과 암호로 이루어진 피 흘리는 현실이 읽혔지만 수의에 싸인 노자는 엉성하게 다듬은 들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만 있었다. 예수는 플레이보이 같았고 노자는 내분비선이 고장난 노총각처럼 보였다. 예수는 오만한 손과 힘찬 몸짓으로 적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노자는 체념한 사람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예수가 낭만주의자라면 노자는 고전주의자였다. 예수는 밀물이요 노자는 썰물, 예수가 봄이면 노자는 겨울이었다. 예수가 이웃에 대한 효율적인 사랑이라면 노자는 허무의 정점이었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었다 (59)
노자를 '내분비선 고장난 노총각'으로 비유한 것을 보고 나는 이 사람이 고립되어 고독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분명히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몇년 전에 방문한 프라하는 묘한 느낌의 도시였다. 착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가 팽배해있지만 음침하진 않았고, 부유해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궁색해보이지도 않았다. 신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애잔한 멋이 있었다. 문학은 이런 데서 싹트는 것인가? 보후밀 흐라발은 프라하에서 공부했고 태어나기는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마침 브르노도 이때 방문했던 곳이라 반갑다.
보후밀 흐라발 자신의 생애가 이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프라하의 카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나치에 의해 대학이 폐쇄된 뒤에는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이 여러 직업 속에는 폐지 꾸리는 인부라는 직업도 포함된다. 후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면서도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법조인으로 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시를 즐겨 쓰던 그는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첫 소설부터 금서로 출판 금지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도 끝까지 체코를 떠나지 않았고 체코어로 글을 썼다.
소설 속 한탸가 일하고 먹고 자는 환경은 쥐과 파리떼로 둘러싸인 더러운 환경이었고 소장으로부터 일을 열심히 하라는 욕설을 인사처럼 들으며 지내지만 그에게는 폐지 속에 섞여 들어온 책을 발견하고 간직하여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었다. 책은 고독의 피신처가 되어 주었고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사는 대신 책 속의 수많은 인물들과 교류하는 시간은 그를 고독과 소외로부터 구해주었다. 이런 와중에 대형 압축기의 등장은 그를 갈 곳 없게 만든다. 그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갸야할지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런 그가 선택한 마지막 길이 가슴 아프다.
자신의 삶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 있다고 느끼며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와 살아가는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한탸는 현대 사회의 소외와 인간 본성이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현대 기술과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 압도당하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한탸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을 꽉 채운 연민의 감정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