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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없어도 밤을 새롭게 하는 법!
『술 없는 밤』이라니. 어떻게 내가 이런 제목의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술 없이 밤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다.
내가 이렇게 반가워하는 이유는 바로 '후천적 알쓰'이기 때문이다.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한때는 주량을 열심히 키워나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맥주 한 잔이면 기분 좋게 취해버리고, 회식 자리에서도 꿋꿋하게 콜라를 마시고, 치맥이 생각나는 날에는 알코올이 전혀 없는 제로 맥주를 마신다.
그런데 왜 난 술을 안 마시지? 글쎄…… 그냥 싫다? 무엇보다 술에 취한 기분이 싫다. 취하면 어지러운데 그게 기분이 좋은 건가. 어지러운 건 어지러운 거다. 비틀거리는 건 비틀거리는 거고, 오바이트는 오바이트다. 의도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 밖으로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술주정이라야만 헛소리가 가능할까. 노트북만 앞에 있으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사람들과 웃고 떠들기 싫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_156~157쪽, 오한기, 「나의 즐거운 알쓰 일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간질간질했던 목구멍을 싹 긁어주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술을 한 잔도 먹지 않는 오한기 작가가 술에 관한 에세이 쓰기를 수락한 이유는 술을 먹지 않는 1인으로서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란다. (맨정신으로 모두 다 말해줘. 얼마든지 읽어줄게!) 작가와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로 지낸 JJ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진솔한 대화가 되지 않는 것 같다며 작가에게 술을 권했다. "아니, 술을 마셔야만 진솔한 대화가 되는 거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와플을 먹으면서도 가능하지 않아"(168쪽) 술김에 하는 이야기가 진솔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시답잖은 거 아닌가.
오한기 작가와 반대로 음악가 오지은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술자리를 좋아해서 참석하는 사람이다. 주정뱅이들이 허공에 날려버리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 한다.
이 책에는 작가, 번역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6명이 쓴 '술 있는' 혹은 '술 없는' 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술에 취한 상태로 쓴 것 같은 글도 있고, 술과 문학을 연결 지어 쓴 글도 있고, 알쓰의 일기 같은 글도 있다. 무엇보다도 술을 찬양하거나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는 흔하지 않아서 좋았다.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새롭고 생경한 순간에 이르기 위해서였다. 이젠 술이 없어도 밤을 새롭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_198쪽, 김세인 「술이 덜어진 몸은 느슨해졌고 틈새가 벌어지더니 어느 순간 북- 하고 갈라졌다」
우리는 어떤 결핍을 안고 일렁이는 물속 어둠에 잠겨 살고, 세계는 밤 너머에 있다. 쩍 벌어진 그 사이를 술과 허구가 채운다. 밤에 출몰하는 거인이 아닌 밤에 거인을 만들어내는 우리 안의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술과 허구가 잠재워준다. 그렇게 외부의 물질, 타인의 의식에 "잠겨" 살아가다 보면, 막상 우리 삶의 이야기는 우리 손가락을 빠져나가 망각의 심연으로 떨어져버린다. 하지만 소설을 읽든 술에 취하든 '도망치는' 게 아니라 '다가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소설을 읽든 술에 취하든 '빠져드는' 게 아니라 '갖고 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도망은 모멸이지만 놀이는 힘이다. _54쪽, 김선형 「술 없는 밤」
밤이 세계가 벌이는 까꿍 놀이라면, 우리는 그 부재의 감각을 반드시 장악해야 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창조한" 놀이로 메꿔야 한다. 나의 시로, 나의 소설로, 나의 노래로, 나의 춤으로. 책을 읽더라도 '내'가 읽어내는 책의 의미를 알고, 술을 마시더라도 '내'가 마시는 술맛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세계가 부재하는 밤의 공간, 불확정성의 공간, 그 미정의 공간을 우리 자아의 창조물로 채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공간을 장악하면 수동성의 모멸감이 사라지고 드디어 의도성의 세계가 열린다. _58쪽, 김선형 「술 없는 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술이라는 정신의 마취제 없이도 하루하루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외부의 힘에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으며, 개인의 진정한 힘과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즉 자기 앞에 닥친 과제들을 (아무리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해도) 하나하나 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다. _59쪽, 김선형 「술 없는 밤」
내 인생의 서사에서 나를 구해줄 영웅은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주당 헤밍웨이는 "글쓰기와 싸움은 차가운 맨정신으로 해야한다"고 말했다. 글쓰기와 싸움은 어쩐지 동어로 읽힌다. 이 필사의 전투를 치른 후 비로소 우리는 성숙한 평화에 가닿는다. _60쪽, 김선형 「술 없는 밤」
그러니 어쩌면 어두운 밤 우리에게는 술에 앞서 철학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밤의 술을 한껏 향유하고 술 없는 밤을 의연하게 건너기 위하여. _61쪽, 김선형 「술 없는 밤」
간절하게 잊고 싶었기에 블랙아웃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오기를 바라며 삼 년이 넘도록 폭음을 일삼았고, 정작 그 일을 제외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_187쪽, 김세인 「술이 덜어진 몸은 느슨해졌고 틈새가 벌어지더니 어느 순간 북- 하고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