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의 위대함은 그가 겪은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증류'해 무엇을 남기는가에 있다. 이 책에서 '증류'에 대한 대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이기도 하지만, 프리모 레비의 '회고록 쓰기'를 압축한 한 단어이기도 하다. 고통이 삶에 가하는 변화를 이토록 아름답고 정제된 언어로 증류해낼 수 있다는 데 경이를 느낀다.
"증류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 또 증류가 아름다운 건 변신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액체에서 (보이지 않는) 증기로, 증기에서 다시 액체로 말이다. 위로 아래로 두 겹의 여행을 하는 사이 마침내 순수한 것에 도달한다. 이것은 모호하면서도 매혹적인 조건이다. 화학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훌쩍 넘어 먼 곳에 이르는 것이다." (89쪽)
<주기율표> 이 책이야말로 화학원소 하나하나에 기대어 출발했지만, 화학을 넘어 "먼 곳"에 도착하는 이야기이다.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기어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마는, 그리하여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손쉽게 인간을 회의하고 인류애를 저버릴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