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밀려나는 웃사내
지난날에는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가시내는 아예 배울 길이나 일할 길마저 막혔다. 안 똑똑하더라도 사내는 그냥그냥 손에 물이나 흙을 안 묻히면서 배울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배움길이나 일길을 함부로 안 막는다. 배우거나 일하고 싶은 누구한테나 길을 연다. 다만 오늘날에는 다들(순이돌이 모두) 손에 물이며 흙을 안 묻히려 할 뿐이고, 몸으로 삶을 맞닥뜨리면서 배우는 곳에 온통 이웃일꾼(이주노동자)이 자리를 채운다. 시골에서 시골버스를 타는 사람은 어느새 이웃일꾼이 꽤 차지한다. 그러나 이 이웃일꾼도 머잖아 다른 고장으로 다른 일(궂은일)을 맡으러 떠난다. 이 시골에 남는 이웃일꾼은 ‘이웃짝(해외결혼)’을 맺은 베트남 아가씨이기 일쑤이다. 베트남 아가씨도 시골살이 너덧 해를 지나면 곧 시골버스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때부터 이분들도 쇠(자가용)를 몰더라.
웃사내는 차근차근 밀려난다. 웃질을 하는 몸이라면 밀려날 만하다. 어울림길을 잊으면서 궂은일을 가시내한테 떠넘기는 모든 넋빈이는 밀려나서 곰곰이 생각을 할 노릇이다. 웃질(가부장권력)은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탓하거나 고개돌릴 노릇이 아니다. 오늘 이곳에서 ‘사내몸’을 입고 태어났든 ‘가시내몸’을 입고 태어났든, 서로 다르지만 나란히 풀어갈 짐(숙제)이 있다. 웃질 아닌 어울림길을 밑바닥부터 살펴서 지을 노릇이요, 주먹질 아닌 어깨동무를 처음부터 헤아려서 지을 노릇이며, 서울바라기 아닌 보금자리숲을 가꾸는 실마리를 나란히 찾고 누릴 노릇이라고 본다. 이제는 웃질이 아닌, 살림길을 열면 된다. 같이 살림을 하고, 함께 살림을 짓고, 나란히 살림을 돌보면 된다.
나흘 동안 구름날과 비날을 잇다가 오늘은 해날을 누린다. 느티나무는 새잎을 낸다. 옅푸른 느티잎은 반가운 나물이다. 함께 저잣마실을 나오는 큰아이한테 느티잎을 똑 따서 건넨다. “느티잎이 아주 부드럽네요!” 하며 놀란다. 갓 돋는 느티잎은 잎자루까지 훑기가 쉽지 않다. 그야말로 살살 손을 뻗어서 천천히 훝어야 한다. 새 느티잎은 대단히 보드라워서 으레 잎이 토막나거나 끊긴다. 그만큼 보들보들 옅푸른 봄나물이라는 뜻이다. 첫봄을 지난 한봄에 이르면 온누리 뭇나무가 내놓는 나뭇잎이 고스란히 나물이다.
괭이밥이 고개를 내밀고 토끼풀꽃이 올라온다. 살갈퀴도 갈퀴덩굴도 한창이면서 곧 스러질 듯하다. 주름잎이 올라온다. 민들레씨가 날린다. 불긋(단풍)나무도 새잎이 곱다. 슬슬 잎빛철이다. 푸르게 적시고 푸릇푸릇 살린다. 이 철빛을 순이돌이가 함께 누리고 나눌 수 있기를 빈다. 해마다 철바람을 새롭게 맞아들일 적에 온누리에 사랑이라는 씨앗이 푸르게 퍼지고 깃들겠지.
우리는 예부터 새를 ‘텃새·철새’ 두 갈래로 바라보았다. 내내 이웃하는 새라서 텃새요, 언제나 노래를 베풀고 보금자리를 트는 슬기로운 빛을 알려주기에 텃새이다. 봄가을과 여름겨울이 갈마드는 길목에 따라서 철바람이 바뀌는 줄 짚고 밝히며 가르치기에 철새이다. 여름을 이곳에서 누리는 봄맞이새는 봄부터 어떻게 살림을 지을 노릇인지 때맞추어 가르친다. 봄맞이새가 떠나는 늦여름과 첫가을이면, 가을살림을 어떻게 맺을 노릇인지 때맞게 가르친다. 이윽고 돌아오는 겨울맞이새는 겨울나기를 앞두고 무엇을 할 노릇인지 어질게 가르친다. 우리는 두 무리 철새를 그윽히 헤아리면서 사람으로서 어떻게 집과 마을을 돌보는 숨빛일 적에 즐겁고 오붓한지 배운다.
서로 푸른순이에 푸른돌이라면 가만히 곱다. 함께 풀꽃가시내에 풀잎사내라면 그윽히 빛난다. 앞으로 우리가 바라보며 걸어갈 길은 ‘갈래(젠더·성별)’가 아닌 ‘푸른씨앗’과 ‘푸른살림’과 ‘푸른집’과 ‘푸른숲’이어야지 싶다. 가르거나 갈라서거나 가로젓는 금은 걷어내자. 가르치기만 하지 말고 배우자. 하루를 가누고, 마음을 가다듬고, 살림을 가꾸고, 서로 손잡고서 걸어가는 길에 서자. 푸르게 우거지는 숲은 파랗게 일렁이는 하늘을 고스란히 머금는다. 푸르면서 파랗기에 숨결이고, 푸르면서 파랗게 일구는 일을 익히기에 사람이다. 2026.4.2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