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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그림책숲 품으로 (+ 하야시 아키코)



  붓을 쥔 어느 분이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일본에서 1973해부터 그림책을 선보인 하야시 아키코(林明子 1945.3.20.∼2026.7.1.) 님입니다. 쉰 해 남짓 붓을 쥐고서 어린이 곁에서 ‘눈뜬 어른’으로서 하루하루 살아온 나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은 어린이부터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이야기숲입니다. 글을 몰라도 누릴 수 있습니다. 글을 모를 적에는 곁에 나란히 앉은 어른이 조곤조곤 말을 섞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밭입니다.


  그림책은 종이에 적힌 대로 글그림을 따라가는 꾸러미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종이에 적힌 글그림을 따라가지만, 이내 글을 살며시 바꾸고, 그림을 가만히 돌립니다. 모든 어린이는 그림책을 즈믄벌(1000번) 두즈믄벌(2000번)쯤 가볍게 읽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처럼 온갖 책을 닥치는 대로 쥐지 않아요. 눈에 꽂히는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책을 마르고 닳도록 되읽고 거듭읽고 새겨읽습니다. 구석자리 하나까지 낱낱이 느끼고 읽은 어느 날, 어린이는 이 그림책에 흐르는 줄거리를 바탕으로 새롭게 이야기를 짭니다. 그림붓님이 글그림 사이에 문득 심은 작은씨앗을 알아채고는, ‘이다음’에 무슨 삶을 펼칠는지 하나하나 북돋우고 키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야시 아키코 님 그림책을 1990해부터 옮겼지 싶습니다. 1990해 언저리는 아직 ‘낱그림책(단행본 그림책)’이 드물고 ‘모둠그림책(전집 그림책)’이 판쳤습니다. 이무렵 몇몇 곳에서는 글몫(저작권)을 맺고서 냈지만, 적잖은 곳에서 낸 모둠그림책은 일본그림책을 슬며시 베끼거나 훔치기 일쑤였습니다. “낱그림책이 팔릴 수 있겠어?” 같은 말이 넘치던 때에 ‘한림출판사’는 낱그림책을 애써서 냈습니다. 이런 몸짓을 지켜본 작은어른은 하나둘 기운을 내어 낱그림책으로 어린이 곁에 서려고 뜻을 모았습니다. ‘마루벌’과 ‘베틀북’ 같은 곳은 모둠그림책이 아닌 오롯이 낱그림책으로 우리나라 어린이한테 그림숲을 베풀려고 땀흘렸습니다.


  일본에서는 1977해에, 한글판은 1991해에 나온, 《이슬이의 첫 심부름》(はじめてのおつかい)이 있습니다. 이제 일본에서는 이 그림책을 발판으로 어린이가 무엇을 ‘소꿉’에서 ‘심부름’을 거쳐서 ‘살림’과 ‘일’로 지피는가 하는 이야기를 담는 새 그림책이 봇물처럼 나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만큼 ‘소꿉·심부름·살림·일’을 하나로 여미면서 ‘나·너·우리’와 ‘집·마을·이웃’을 고스란히 들려주는 사랑스러운 붓끝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조금만 헤아려도 알 수 있어요. 지난날 어버이는 언제나 “아이 스스로 소꿉놀이를 할 틈”을 내주었습니다. 이러면서 “아이한테 심부름을 맡겼”고, 곧잘 “집안일을 도맡기”기도 했습니다. 지난날 어버이는 아이들이 소꿉과 심부름과 집안일을 맡을 적에 둘레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스리고 다루면서 달래는 길을 익혀서 천천히 철드는 길을 말없이 가르치고 물려주었어요.


  오늘날에는 아이한테 심부름을 맡기는 어버이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아이 스스로 소꿉놀이를 할 틈”을 아주 빼앗습니다. 아이한테 손전화를 덩그러니 맡기면서 팽개치기 일쑤예요. 시골이든 서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손전화 없이 맨손과 맨발과 맨몸으로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를 볼 수 없습니다. 맨손으로 나무를 타거나, 맨발로 흙밭에서 뛰거나, 맨몸으로 들숲메바다에서 노는 아이가 어디 있을까요?


  서울뿐 아니라 시골조차 ‘노란수레(노란빛 학교·학원버스)’가 아이들을 “집과 학교 사이” 또는 “학교와 학원 사이” 또는 “학원과 학원 사이”를 실어나르다가, 마지막에는 “학원과 집 사이”를 실어나르는 얼거리입니다. 시골아이조차 노상 노란수레에 몸을 싣느라, 봄에 보리가 익는지, 여름에 모내기를 하는지, 가을에 나락을 베는지, 겨울에 억새씨가 날리는지 아예 밖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다들 손전화를 멍하니 입을 헤 벌리면서 들여다볼 뿐입니다.


  한글판으로 나온 하야시 아키코 님 모든 그림책을 두 아이하고 두고두고 즐긴 나날을 돌아봅니다. 하야시 아키코 님 그림책은 아이어른이 나란히 앉아서 읽는 즐거운 이야기숲인데, 아이들은 어느새 푸름이를 지나고 젊은이로 서면서 문득 이 그림책을 되읽습니다. 다섯 살이나 열 살뿐 아니라 열다섯 살이나 스무 살에 읽어도 눈길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는 줄 깨닫지요. 이러다가 짝을 만나서 사랑을 나누며 보금자리를 지을 무렵, 어릴적 읽던 그림책을 다시 찾아보면서 “아이를 낳은 새아이(어른이 된 아이)”로서 새삼스레 “아이어른이 함께 누리는 그림책”이라는 숨빛을 느끼고 들려주며 물려줍니다.


  요사이 ‘어른그림책(어른만 보는 그림책)’이 바람(유행)을 타고서 잔뜩 나옵니다. 어른만 보는 그림책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여러모로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어른그림책은 아이가 볼 수 없거든요. 아니, 어른그림책은 아이를 아예 아랑곳하지 않는 얼거리로 나온 터라, ‘그림책’이라는 숨빛을 잊기 일쑤예요. 그야말로 모든 어른그림책은 ‘눈물달래기(위로·위안·치유·힐링·여행)’에서 멎고 멈추고 그칩니다. ‘그림책’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책은 모름지기 “누구나 읽고 누리고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철들어 살림빛을 작은씨앗으로 심어서 손수 일구고 깨우는 즐거운 걸음걸이”인 줄 모르는 셈입니다.


  덧붙이자면, 그림책이 왜 “아이어른이 함께 누리는 책”이면서 ‘누구나책’이냐 하면, 처음부터 그림책은 ‘놀이 + 노래’를 바탕으로 ‘나 스스로 + 너랑 함께’라는 실마리로 이어서 ‘서로이웃 + 둥글게 두레 + 도우며 동무’라는 속마음을 담거든요. 한글판으로 나온 하야시 아키코 님 그림책을 가만히 짚어 보겠습니다.


  《이슬이의 첫 심부름》은 아이 스스로 내딛는 발걸음으로 집과 마을과 이웃과 새와 모두를 천천히 알아가고 사귀면서 기쁘게 일하고 돕는 마음을 웃음꽃으로 배우는 이야기입니다. 《순이와 어린 동생》은 ‘나’도 어리지만, 나보다 어린 동생을 지켜보고 돌아보면서, 내가 어떻게 사랑받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목욕은 즐거워》는 뛰놀 적에만 즐거울 일이 없이, 씻고 치우고 갈무리하는 모든 일도, 그러니까 빨래하고 말리고 걷고 개는 일까지도, 언제나 즐거운 하루인 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숲 속의 요술물감》은 ‘예술’도 ‘문화’도 ‘교육’도 아닌 숲이웃하고 나란히 어울리면서 붓으로 노래하듯 놀면서 태어나는 그림이 아름드리나무처럼 아름답다고 하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종이비행기》는 어린이가 저희 손으로 한 땀씩 빚고 짓고 가꾸는 동안 서로서로 바람을 타고 바람을 가르고 바람하고 속삭이는 발걸음과 손짓이 노래로 피어나는 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래오래 아이 곁에서 읽히는 《달님 안녕》이며 《은지와 푹신이》이며 《숲 속의 숨바꼭질》이며 《오늘은 무슨 날》이며 《10까지 셀 줄 아는 아기염소》이며 《우리 친구하자》이며, 다들 아름답게 피어나는 붓끝으로 노래하는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 한 자루를 쥐고서, 그림책으로 숲을 짓는 길을 천천히 걸어온 분이 눈을 감았습니다. 모든 아름드리숲은 처음에는 씨앗 한 톨이었습니다. 우리 사람도 처음에는 더없이 작은 씨앗 한 톨이었습니다. 암꽃과 수꽃이 저마다 하나씩 품은 작은씨가 만나기에 풀과 나무로 자라나서 어느덧 푸른바람이 일렁이는 숲으로 거듭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마다 하나씩 품은 작은씨가 만나기에 아기로 태어나서 어느새 푸른들을 마음껏 달리며 뛰노는 작은사람으로 어버이 곁에 섭니다.


  그림책숲을 이룬 쉰 해를 마감하고서 떠나는 길은 아쉽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누리고 즐기면서 그림붓을 이어받은 그림지기가 새롭게 있거든요. 다 다르게 그림붓을 잇고, 저마다 새롭게 그림길을 걷습니다. 놀이와 노래를 밑자락에 부드럽게 펼치고서, 살림과 소꿉과 일이 즐겁게 만나는 길을 차분히 엮어내는 손길이 반짝입니다. ‘살림’이란 “살리는 손빛으로 이루는 일”을 가리킵니다. 숨을 살리고, 몸을 살리고 마음을 살리기에 ‘살림’입니다. 살리는 손길로 하루를 지내기에 ‘살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살림을 짓고 삶을 누리면서 사이를 새롭게 잇는 동안 사랑에 눈뜨고 사랑으로 일어서는 목숨붙이입니다.


  숲으로 돌아간 그림님 한 분을 그리고 기립니다.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아흐레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글 한 자락을 쓸 수 있군요. 고맙습니다. 2026.7.10.


ㅍㄹㄴ


https://www.ehonnavi.net/author.asp?n=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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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아키코 #林明子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포근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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