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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조금 산 책



  어제는 부산에 닿아서 세 군데 마을책집을 들러서 책을 조금 샀다. 어제 산 책을 오늘 04시부터 09시까지 읽다가 주섬주섬 짐을 꾸린다. 10:50에 부산 사상나루에서 순천으로 건너가는 버스를 타려고 한다. 등과 가슴에 책짐을 묵직하게 지고 안으며 한참 걷는다. 2000길(m) 남짓일까. 서면에서 갈아타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조금 헤매고 빙그르르 돈다. 살짝 땀방울이 돋고, 등허리랑 팔뚝이 조금 결린다. 밖으로 나오니 햇볕이 뜨끈하고 햇살이 눈부시고 햇빛이 환하다. 맞이칸에 등짐과 책짐을 부린다. 종이를 끊는다. 숨을 돌리고서 발바닥과 발가락을 천천히 푼다. 어깨를 토닥이고 옆구리를 주무른다. 목과 머리를 꾹꾹 누르고, 눈 언저리도 살살 꼬집는다. 이제 순천버스가 들어온다. 짐칸에 싣고서 버스일꾼한테 꾸벅 허리를 숙인다. 자리에 앉는다. 가늘게 한숨이 나온다. 여기까지 잘 날랐다. 시외버스 짐칸에 톡 실은 짐은 아늑히 쉬겠지. 나도 글붓짐하고 책 석 자락만 챙겼다. 그런데 첫 책을 펼치려 하니 바로 졸립다. 앉자마자 졸린 셈인가. 책을 좀더 읽고, 노래도 한두 꼭지 새로 쓰고, 하루글도 몇 쪽 쓰려고 했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졸음꽃이 흐드러진다. 아, 아, 아, 왼손에 쥔 책을 옆으로 밀친다. 오른손에 쥔 붓을 제자리에 꽂는다. 왼손을 명치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댄다. 두 손으로 속을 포근히 토닥이면서 숨부터 돌리자. 한숨 자고 나서 뭘 하든지 하자. 까무룩 꿈길로 가려는데 손전화가 덜덜덜 춤춘다. 이웃님이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하신다. 가만히 듣고 들려준다. 다시 눈을 감는데 어느새 졸음꽃이 모두 졌다. 그런가? 그렇다면 무엇부터 할까. 노래부터 한 꼭지 쓴다. 하루글을 두 꼭지 쓴다. 책을 한 자락 읽는다. 책을 한 자락 더 읽는다. 새로 쓸 노래 한 꼭지는 밑틀만 짚어 놓는다. 하루글을 한 꼭지 더 쓴다. 석 자락째 책을 쥐다가 덮는다. 이제 순천에 닿는구나.


  순천에 닿아서 고흥 가는 종이를 끊는다. 바로 옆에 선 고흥버스에 짐을 싣는다. 자리를 잡는다. 옆 너머에 앉은 아재가 발바닥을 긁으면서 쩌렁쩌렁 소리에 걸쭉한 고약말을 섞어서 한참 떠든다. 귀에 꽂아서 노래를 듣는데 눈금을 둘 키운다. 아까 읽다가 덮은 《학교는 죽었다》(에버레트 라이머)를 뒤부터 다시 읽는다. 1994해에 처음 만나셔 여태껏 이미 여러 벌 읽은 책인데, 새로 쥐어서 읽을 때마다 그야말로 새롭다. “School is Dead.” 이 책이 이웃나라에서 처음 나올 때뿐 아니라, 한글판이 처음 나온 1982해에도, 또 올해 2026해에도, 아직 우리나라는 “배움터가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집 두 아이는 8살부터 ‘졸업장학교’를 다니지 않는데, ‘집에서 스스로 살림길을 익히며 배움길을 걷는 아이’한테는 이 나라가 1원조차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집은 꼬박꼬박 낛(세금)을 다 낸다. 두 아이는 어린이집도 안 다녔기에, ‘아동장려금’하고 먼 채로 지냈다. 한때에는 우리집 아이들처럼 집에서 스스로 배우는 어린이와 푸름이를 ‘비행청소년’이나 ‘학교부적응자’나 ‘학교밖 청소년’이라 하더니, 요새는 ‘위기 청소년’이라는 이름을 쓰더라. 아이들은 여덟 살에도 열아홉 살에도 똑같은 ‘사람’인데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가리키는 이름은 늘 널뛰기를 한다. 그들은 이 아이들한테 1원조차 쓴 바가 없지만, 이 아이들을 가리키는 이름은 언제나 사납다.


  어제 부산책집 세 곳에서 책을 조금 샀다. 조금 산 책이 얼추 일흔 자락 남짓이지 싶다. 지난달까지 신나게 사들인 책이 꽤 많아서, 이달 한봄에는 어제하고 그제까지 딱 120자락 책을 샀다. 사읽고 싶은 책은 500자락이 넘는데, 눈에 밟히는 책을 참고 못 본 척하고 눈감으면서 견딘다. 그래도 어제는 부산에서, 그제는 누리책집에서 이럭저럭 120자락을 장만했으니 조용히 읽자. 시외버스는 어느덧 고흥읍에 닿는다. 저잣마실을 가볍게 한다. 모처럼 택시를 부른다. 택시에 타고서 하루글을 한 꼭지 더 쓴다. 집 앞에 닿는다. 짐을 내린다. 큰아이가 해놓은 빨래를 뒤집는다. 햇볕을 고루 먹여야지. 발바닥과 고무신을 헹군다. 짐을 다 들이고서 씻는다. 씻고 나서 드디어 오늘 밥 한 그릇을 누려 본다. 구름 한 조각조차 없이 새파란 하늘을 가르는 제비가 노래한다. 제비뿐 아니라 크고작은 뭇새가 노래숲을 편다. 한봄 한낮볕이 꽤 뜨끈한 탓인지 개구리는 조용하다. 개구리는 아무래도 저물녘부터 노래가락을 펴겠지. 2026.4.13.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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