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책을 읽다 6 캐묻지 않기

책벌레수다 : 나물캐기 돌캐기 뒤캐기



  캐묻는 사람을 곧잘 만난다. 나이가 몇이냐고 캐묻고, 내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둥 “엄마나 아빠가 먼나라 사람 아니냐?”는 둥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먼나라 사람 아니냐?”는 둥 끝없이 캐묻는 사람이 곧잘 있다. 내 나이가 이녁보다 많으면 어른으로 섬길 마음 같아 보이지 않고, 내 나이가 이녁보다 적으면 깎음말을 쓰려는 티가 물씬 난다. 더구나 때가 어느 때인데 2026년에 이르도록 얼굴캐기(외모평가)를 버젓이 하는지 참으로 얄망궂다. 그러려니 하며 지나가곤 하지만, 그만큼 우리 민낯이라는 뜻이요, 틀(차별금지법)을 세운들 삶자리에서 마구잡이로 캐묻는 늪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 듯하구나 싶다.


“당신, 성실하구나?” “어?” “성실하지 않은 인간을 성실하게 대할 필요가 있나?”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6》 113쪽


  살림을 짓는 수다를 펴면 서로 즐거울 텐데, 어쩌면 나 혼자만 ‘살림수다’가 즐거운 듯싶다. 둘레에서는 ‘살림수다’가 아닌 ‘화살질·손가락질’을 신나게 하려고 든다. ‘저놈’은 고리타분하다고 화살질이고, ‘그놈’은 건방지다며 입방아를 찧는다. 서로 잘잘못을 짚으면서 함께 배우려는 살림수다라면 화살질이나 손가락질이 아닌, 이렇게 가다듬어서 세우고 저렇게 쓰다듬어서 북돋우자는 이야기로 흐르게 마련이다. 치레글이나 꾸밈글을 쓰지 말자고, 보람(문학상·우승)을 노리지 말자고, 이름책(유명도서)이라는 허울에 휩쓸리지 말자고, 오직 우리 스스로 두고두고 되읽으면서 아이한테 물려줄 살림을 짓듯 글을 쓰고 책을 읽자는 살림수다를 함께하고 싶다. 목소리(주의주장)가 아닌 살림소리(생활지혜)를 나눌 적에 함께 울고 웃으면서 하루가 느긋하다고 느낀다.


생계 부양자로서 성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남자들은, 여자들을 비난하고 혐오하거나 여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 … 급진주의 여성주의자들에게 남성은 (국가나 자본보다) 주적이었고, 젠더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모순이었다 … 찌질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여성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자고 말한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7, 39, 179쪽


  누가 누구를 ‘분석’한다고 하는 말을 들을 적마다 “제발 캐지(분석) 맙시다” 하고 손사래를 친다. ‘캐내기(분석·해석)’가 아닌 ‘읽기(이해·숙독)’를 하자고 덧붙인다. 다섯 살 아이가 말하든, 열다섯 살 푸름이가 말하든, 스물다섯 살 젊은이가 말하든, 서른다섯 살이나 마흔다섯 살 아재가 말하든, 쉰다섯 살이나 예순다섯 살 젊은할배가 말하든, 일흔다섯 살이나 여든다섯 살 할매가 말하든, 그저 ‘말’이라는 소리에 얹은 ‘마음’을 가만히 읽고서, 우리 마음을 나란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누리자고 보탠다. 사내(남성)를 캘 까닭도, 가시내(여성)를 캐낼 까닭도 없다. 그저 서로 생각하고 헤아리고 살피고 들여다보고 눈여겨보면 된다. 누구나 문득 눈을 뜨면서 말빛을 알아차릴 날을 지켜보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모르기에 어설프게 넘겨짚듯 캐려고 하게 마련이다. 이제부터 알아가려고 너무 힘쓰다 보니, 차근차근 읽으면서 알아가기보다는 얼른 서둘러서 바삐 캐내려고 허둥거린다고 느낀다.


그들은 민주당의 문제를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야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왜 이전엔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었을까? 왜 뒤늦게 혼자 깨끗한 척하고 혼자 잘난 척하려는 걸까? … 유시민을 비롯한 그 주동자들은 민주당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정당이라 하더라도 그 정당이 투표 행위를 통해 유권자들과 연계돼 있다는 건 아예 처음부터 무시하고 들어갔던 것이다. 《노무현은 배신자인가》 217, 222쪽


  겨울이 걷히고 새봄으로 접어들면 늦겨울꽃과 첫봄꽃이 흐드러진다. 그러나 꽃은 늦겨울과 첫봄에만 피지 않는다. 한봄과 늦봄에도 핀다. 첫여름과 한여름과 늦여름에도 핀다. 첫가을과 한가을과 늦가을에도 꽃이 피고, 첫겨울과 한겨울에마저 꽃이 핀다. 첫여름꽃과 늦가을꽃은 ‘늦꽃’일 수 있되, ‘그저꽃’이다. 모두 제철에 제대로 피면서 제빛을 살리는 제길과 제살림을 일으키는 제걸음이다. 서둘러 익으려는 열매란 없다. 모든 열매는 차분히 차근차근 느긋이 무르익는다. 덜익은 수박을 쪼개면 얼마나 시큼한지 아는가? 겉보기만으로는 익었는지 멀었는지 모를 수 있으나, 긴긴 해에 걸쳐서 지켜보면 겉보기로도 너끈히 익음결을 알 수 있다.


“할머니도 기뻐하고 계실 거야.” “뭐?” “모모가, 할머니의 기모노를 물려받아서.” 《사랑하라 기모노 소녀 1》 49∼50쪽


  때로는 서두를 수 있다지만, ‘모든 때’에 서두른다면 삶이란 어디 있을까? 이따금 빨리빨리 마감에 맞춰야 한다지만, ‘언제나’ 마감에 맞추어 움직인다면 살림이란 뭘까? 동무가 없는 아이는 없다. 동무가 없는 어른은 없다. 사람만 동무이지 않다. 나무도 새도 풀도 돌도 바람도 비도 눈도 해도 별도 꽃도 씨앗도 벌레도 나비도 벌도 잠자리도 동무이다. 온누리 뭇숨결은 서로 동무이다. 푸른별에서 나고자라는 모든 목숨붙이는 다 다르게 동무이다. 사람으로 친다면, 엄마아빠가 온누리 첫 동무요, 할매할배가 이다음 동무요, 집안에 있는 모든 살림이 셋째 동무이다. 집밖에서 마주하는 바람과 해와 비와 흙과 풀과 벌레와 나비와 새와 들짐승이 넷째 동무이지. ‘또래 동무’는 거의 열째나 스무째쯤 되는, 또는 쉰째나 일흔째에 닿는 동무이다. ‘사람동무’만 찾으려고 하니 외롭거나 쓸쓸하다고 잘못 여기고 만다.


“이래 봬도 할머니일 땐 꽃 만지는 걸 좋아했거든. 게다가 이건 기차놀이도 가능한 길이지!” “그러네!” “출발합니다.” “후후, 기차놀이는 처음 해봐. 화환도.” “거짓말. 연꽃이랑 민들레로도 만들 수 있는데? 어린 시절 한 번도 안 해봤누?” “으음, 난 별로 어린애다운 어린애가 아니라서.” “아니면 전생의 어린 시절이라든가.” 《할망소녀 히나타짱 10》 104쪽


  서울을 바라보면 서울이 익숙하고 반갑게 마련이다. 서울에서 살더라도 푸른별을 품으면서 파른별을 그리면, 서울이 아니어도 온누리 어느 곳이나 익숙하고 반가울 수 있다. 서울에서도 시골을 품을 수 있고, 시골에서도 서울과 만날 수 있다. 들빛을 찾아보면 들빛이 마음과 말에 녹아든다. 숲빛을 찾아나서면 숲빛이 마음이며 말뿐 아니라 몸에도 스며들 테지. 그러니까 억지로 캐내려 하지 말자. 자꾸자꾸 캐묻지 말자. 캐거나 캐내려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서, 그저 마음을 나누는 말을 도란도란 엮고 이으면서 ‘이야기’를 하자. 숲빛으로 수수하게 ‘수다’를 하자. 수런수런 수더분하게 피어나는 수다밭을 지을 수 있기에, 일렁일렁 파란바람과 파란바다를 품은 노을빛과 너울빛으로 어깨동무를 한다. 캐고 싶다면, 뒤를 캐지 말고 나물을 캐자. 밭자락에 있는 돌을 캐서 돌담을 바람막이로 쌓자. 즐거이 나물을 캤으면 나 한 줌 너 한 줌 나누면서 노래하자. 이러면 된다.


ㅍㄹㄴ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6》(마츠무시 아라레/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10.31.)

#自轉車屋さんの高橋くん #松蟲あられ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권김현영 엮음, 교양인, 2017.5.26.)

《노무현은 배신자인가》(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12.16.)

《사랑하라 기모노 소녀 1》(야마자키 제로/이상은 옮김, 시리얼, 2020.6.25.)

#戀せよキモノ乙女 #山崎零

《할망소녀 히나타짱 10》(쿠와요시 아사/서수진 옮김, 대원씨아이, 2025.11.15.)

#桑佳あさ #老女的少女ひなたちゃん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