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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안부전화



  나더러 어찌 ‘안부전화·안부인사’도 없이 사느냐고 타박한다. 아이곁에서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글쓰고 책읽는 사람으로 지내는 나날이라서, 굳이 “잘 지내나요?” 하고 묻는 말을 안 한다. 이미 푸른별 온사람은 마음과 마음으로 이은 사이인걸. 손소리를 걸거나 보따리를 지고서 찾아가지 않더라도, 손글월을 띄우거나 새로 낸 책을 보내잖은가.


  말로만 “잘 지내십니까?” 하고 여쭐 마음이 없다. 겉절(형식적 인사)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나라이지만, 겉절보다는 속절·마음절을 하고 싶다. 별빛으로 절하고, 숲빛으로 절하고, 풀내음으로 절하고, 멧새가락으로 절하려고 한다.


  목소리만 낼 마음은 없다.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 마음이 없다. ‘목소리내기’하고 ‘얼굴내밀기’를 다 끊으며 산다. 무슨 일이든 맺고 풀려면 ‘안부전화·안부인사’를 꼭 해야 한다는데, 겉절이 아닌 속절과 빛절로 어울리면서 새롭게 이야기하고 푸르게 노래하는 길을 그린다. 곰곰이 보면, 벼슬자리 사람들은 책도 글도 안 읽는다고 하니, 손글월이나 책을 띄운들 그분들한테 덧없을 만하다. 그러나 벼슬자리 여러분이 책이나 글을 곁에 안 두는 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분들한테 손글월이나 책을 띄우거나 건네려고 한다.


  늦겨울비가 내린다. 꽃샘비로구나 싶다. 이제 꽃망울을 틔울 때라고 살살 북돋우는 빗방울이라고 느낀다. 얼핏 찬비 같지만 가만히 풀고 녹이면서 깨우는 봄맞이비이지 싶다. 살갗으로 빗물을 받노라면 이 비가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지 읽을 수 있다. 빗소리를 귀여겨들으면, 이 빗소리가 노랫소리요 풀숲소리에 하늘소리에다가 바닷소리인 줄 느낄 수 있다.


  나는 늘 풀꽃나무한테 하루를 묻고서 듣는다. 나는 풀꽃나무를 동무하는 너를 반가이 만난다. 함께 보고 함께 걷고 함께 놀고 함께 자란다. 같이 보고 같이 걷고 같이 놀고 같이 큰다. 나란히 보고 나란히 걷고 나란히 놀고 나란히 나아간다. 너하고 나는 한 손에 씨앗을 쥔다. 나하고 너는 다른 손에 햇볕을 놓는다.


  잎을 틔우는 입으로 말 한 마디를 그린다. 잎사귀를 여미는 입술로 바람줄기 한가닥을 쓰다듬는다. 이제 고흥읍 버스나루에 나온다. 손소리를 쩌렁쩌렁 틀며 듣는 아가씨한테 제발 소릿줄을 쓰라고, 5000원이면 산다고 열 벌쯤 말했는데, 오늘 드디어 소릿줄을 귀에 꽂네. 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할매랑 할배랑 아지매랑 아재랑 푸름이랑 어린이는 온(100) 벌 넘게 얘기했어도 여태 아무도 소릿줄을 안 쓴다.


  눈을 감자. 제비꽃이 필 즈음을 그리자. 꽃피고 제비가 날아들 날을 그리자. 부산 가는 시외버스가 들어온다. 천천히 탄다. 자리에 앉는다. 짐을 내린다. 종이를 꺼내어 하루글을 쓴다. 오늘 차근차근 내딛는 걸음마다 드리울 이야기를 한 자락 두 자락 여민다. 내 몸은 버스에 싣되, 내 마음은 바람에 얹는다. 나는 버스라는 쇳덩이에 몸을 두되, 파랗게 틔울 하늘빛에 마음을 놓는다. 2026.2.27.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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