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위로하지 않는다
2007∼08년 즈음 내 얼굴을 찍은 어느 분이 사진책을 내며 ‘인천사진작가’ 가운데 하나로 실어도 되겠느냐 묻는다. 없던 일로 하시라고, 빼라고 하려다가 그만둔다. 한참 그분 말을 들어보고서 끊었다. 그분은 내가 쓴 글이나 책을 읽어 보았을까? 앞으로는 읽을까? 속빛을 못 읽으면서 겉빛만 좇는다면, 사진이 아니라 ‘사진시늉’일 뿐인데. “부디 ‘사진시늉’이 아니라 ‘사진’을 하십시오.” 하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몸앓이를 하며 곧 저승길에 갈 듯하다고 하시기에, 이제는 어떤 도움말도 안 들을 듯하다고 느낀다. 그동안 그분을 뵐 적에 들려준 말 가운데 하나도 받아들인 바가 없으셨으니 그러려니 할밖에 없다.
나무는 사람을 달래주지 않는다. 사람은 나무를 달래줄 수 없다. 꽃은 사람을 달래주지 않고, 사람이 꽃을 달래주지 않는다. 바람은 사람을 안 달래준다. 사람도 바람을 못 달랜다. 바다는 사람을 달래주지 않고, 사람은 바다를 달래주지 않는다. 흙도 모래도 별도 샘도 갯벌도 씨앗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스스로 그곳에 고스란히 있다.
나는 누구도 달래주지 않는다. 남이 나를 달래줄 수 없다. 내가 너를 달래지 못할 뿐 아니라, 네가 나를 달랠 수 없다. 이 대목을 제대로 보고 받아들여서 배울 적에, 비로소 너랑 나랑 사근사근 만난다. 우리는 “달랠 사이”가 아닌 “만날 사이”이다. 우리는 “달래주는 손끝”이 아니라 “저마다 지으면서 함께 나누는 손길”이다.
나는 나를 달래지 않는다. 너도 너를 달래지 않는다. 그저 보고 바라보고 들여다보다가 스스로 문득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본다. 구름 사이로 새 두어 마리 볼 테지, 네 마음과 내 마음을 잇는 눈빛이 밝은 줄 알아챌 테지. 새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런 자국이 안 남는 줄 느낄 테지. 아무런 자국은 없지만 바람길이 있고, 바람길은 늘 바뀌는 빛줄기인 줄 헤아릴 테지.
아무도 누구를 달래지 않는다. 언제나 스스로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길꾼(철학자나 도인) 같은 소리가 아니다. 나는 나로서 살고 너는 너로서 살기에, 나는 내 삶길을 너한테 말하고, 너는 네 삶꽃을 나한테 들려준다. 우리는 서로 누구이든 달랠 까닭이 없다. 우리는 서로 스스로 하루를 짓는다. 달래주기를 바라지 말자. 달래려고 나서지 말자. 언제나 오늘 이곳에 가만히 서서 바람을 쐬고 해를 쬐고 풀내음에 꽃내음을 맡으면서 숨을 느긋이 쉬자.
숨을 쉬면 된다. 숨을 고르면 된다. 숨을 가누면 된다. 나무가 내쉰 바람을 내가 마신다. 내가 내쉰 바람을 나무가 마신다. 누구도 누구를 ‘위로(慰勞)’하지 않는다. ‘위로’한다고 내세우거나 밝히거나 앞세우거나 떠드는 ‘놈’이 있다면, 모두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다. ‘위로(慰勞)’와 ‘위안(慰安)’이 거의 같은 한자말인 줄 아는가? ‘일제강점기 종군위안부’뿐 아니라 ‘중국사대주의 조선위안부’를 벌써 잊었는가? ‘위로·위안’은 고이 내려놓고서, ‘달래기’도 그저 놓으면서, ‘짓기·빚기·일구기·가꾸기·꾸리기·심기·돌보기·보살피기·나누기·펴기·노래하기’로 가면 된다.
누구나 누구하고라도 이야기를 하면서 말소리를 거쳐서 마음을 나눌 뿐이다. 마음을 나누는 말소리와 눈길과 숨결이 흐르기에, 모든 멍울과 생채기와 고름이 스르르 녹고 풀린다. 해주지 않고 해줄 수 없다. 그냥 하고서 또 하고 새로 한다. 다시 하다가 새삼 하고 거듭거듭 한다. 늘 하고 노상 하고 한결같이 한다.
묵은책 한 자락을 읽는다. 쉰 해라는 나날이 넘어가는 책자락에 감도는 지난날 삶빛을 새로 느낀다. 갓 나와서 오늘 막 들어왔다는 그림책을 장만해서 읽는다. 서울에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천천히 넘긴다. 어느 책도 우리를 달래주지 않는다. 어느 책이든 읽는 동안에 우리 마음에 씨앗 한 톨씩 건넨다. 나도 너도 책을 읽으면서 슬며시 받은 씨앗을 서로 마음밭에 가만히 심는다. 오늘 받은 씨를 오늘 심기도 하고, 이튿날이나 이듬해에 심기도 하고, 때로는 스무 해나 쉰 해를 건사하다가 드디어 심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 심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틑 적에 스르르 녹고 풀린다. 남한테서 달램말을 들어야 하지 않아. 남한테 달램말을 들려주어야 하지 않아. 넌 이미 너 그대로 사랑이기에, 넌 너 그대로 빛나. 나는 나 그대로 사랑이어서 난 늘 나 그대로 밝아.
붐비는 전철길에 섞인다. 읽고 쓰고 듣고 새기면서 낮빛을 본다. 고흥에 제비가 돌아와서 노래한다고 우리집 두 아이가 웃으며 알려준다. 고맙다. 2025.3.2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