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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 배영옥
  • 10,800원 (10%600)
  • 2019-06-11
  • : 395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11.30.

노래책시렁 523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배영옥

 문학동네

 2019.6.11.



  아무리 고되거나 힘겹게 일을 하더라도 노래하던 겨레입니다. 한겨레뿐 아니라, 푸른별 온겨레는 저마다 살림을 지은 바탕으로 일노래와 살림노래와 놀이노래가 오래오래 흘렀어요. 글은 몰라도 입으로 노래했고, 노래를 종이에 적지 않았어도, 온삶으로 부르는 노래는 온마음으로 남아서 두고두고 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움터(학교·서당·서원)를 다닌 사람은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모름지기 ‘노래’란 스스로 우러나오는 빛살입니다. 남이 가르치거나 시킬 적에는 ‘노래’가 아닌 ‘늪’이자 ‘굴레’입니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는 ‘시’입니다. 조금도 노래가 아닙니다. 노래로 다가서려 하지도 않습니다. 배움터나 글판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워서 틀에 맞추는 ‘시’에 머뭅니다. 글삯을 받고 책을 내려면 ‘시’를 써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떤 ‘시’에서도 삶은 묻어나거나 흐르지 않더군요. 삶을 슬쩍 내비치는 듯 꾸미고, 삶을 살짝 흉내내는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사그라들기에 ‘시’입니다. ‘시쓰기’는 안 나쁘되, 노래나 글이 아닌 ‘시’만 쓰려고 하면 자꾸자꾸 허울에 갇혀요. 허우대만 키우는 굴레인 ‘시문학’입니다. 이제는 모든 틀과 담과 힘에다가 붓까지 내려놓고서 맨몸으로 노래할 때이지 않을까요?


ㅍㄹㄴ


원하지 않아도 / 언제나 길들여 나오는 토마토케첩처럼 / 숱한 감정에 나를 살아보기도 했다 (그림자와 사귀다/16쪽)


비누는 비누의 이름보다 좀더 슬픔을 가진 / 뼈대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뼈대의 감정/23쪽)


어제 그제의 네 구두가 아니라, 어제 그제 그끄저께의 네 속옷들이 아니라, 젖내 풍기는 젖먹이의 배냇저고리가 아니라, 네가 태어나기 이전 너와집 아궁이의 다 타버린 재가 아니라, (재활용함/39쪽)


+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배영옥, 문학동네, 2019)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 글님은 없고 글씨만 남기리라

→ 글보는 없고 글월만 남으리라

→ 글꾼은 없고 글만 남으리라

12쪽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 먼저 다녀간 뒷자리가 궁금하리라

→ 누가 먼저 다녀간 뒷내가 궁금하리라

12쪽


내가 당신의 방패가 되어주었다면

→ 내가 너를 감싸 주었다면

→ 내가 너를 막아 주었다면

→ 내가 자네를 보듬었다면

→ 내가 그대를 돌봤다면

13


어느 날 과거와 미래의 다른 얼굴이 나를 찾아온다면

→ 어느 날 어제와 모레가 다른 얼굴로 나를 찾아온다면

→ 어느 날 뒷날과 앞날이 다른 얼굴로 나를 찾아온다면

17


신(神)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부터

→ 하늘이 우리한테 물어볼 때부터

→ 님이 우리한테 물을 때부터

18


의자를 관(棺)처럼 떠받드는

→ 걸상을 주검널처럼 떠받드는

→ 걸상을 널처럼 떠받드는

20


이곳은 흰 공간에 아무것이나 채워넣은 것처럼

→ 이곳은 흰데 아무렇게나 채워넣은 듯

→ 하얀 이곳에 아무렇게나 채워넣은 듯

21


비누는 비누의 이름보다 좀더 슬픔을 가진 뼈대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 비누는 비누란 이름보다 좀더 슬픈 뼈대라는 마음에 가깝고

→ 비누는 비누란 이름보다 좀더 슬프게 뼈대 마음에 가깝고

23


짧은 주석 하나 없이 한 생애가 저리 일목요연할 수 있다니

→ 덧말 하나 없이 한살이가 저리 가지런할 수 있다니

→ 붙임말 짧게 없이 한삶이 저리 번듯할 수 있다니

28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 네 빛나는 손바닥을 만진 적이 있지

→ 그대 빛나는 손바닥을 쥔 적이 있지

33


당신 손바닥 위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 나는 네 손바닥에서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 난 그대 손바닥에서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33


정리되지 않은 시구(詩句) 속을 헤맬 때도

→ 글월을 못 추스르고 헤맬 때도

→ 노래를 못 가다듬고 헤맬 때도

3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던진 돌멩이

→ 누가 나한테 던진 돌멩이

40


태양 아래 포도나무 잎사귀만 무성하게 푸르고

→ 햇볕에 포도나무 잎사귀만 푸르게 우거지고

→ 뙤약볕에 포도잎만 짙푸르고

→ 여름볕에 포도잎만 짙푸르고

44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 숨은 뒤를 들여다볼 수 있는

→ 숨은 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60


포시랍다는 말의 온기로 그 말의 사랑으로 그 말의 넉넉함으로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고

→ 포시랍다는 따뜻한 말로 사랑으로 넉넉하여 나는 아직 철딱서니가 없고

67


내게 서너 개의 가면이 있습니다

→ 나는 탈이 서넛 있습니다

→ 난 서너 가지 탈이 있습니다

70


송홧가루 덮인 연못 아래

→ 솔꽃가루 덮인 못에

→ 솔꽃가루 덮인 물밑에

75


들판으로부터, 햇빛으로부터, 바람으로부터, 바다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 들판에서, 햇빛에서, 바람에서, 바다에서, 조금씩 멀어간다

→ 들판을, 햇빛을, 바람을, 바다를, 조금씩 멀리한다

87


어느 날 나는 신원 불명의 변사체로 발견될 것이다

→ 어느 날 나는 알 길 없는 주검으로 나온다

→ 어느 날 나는 수수께끼로 죽은 채 나타난다

90쪽


날로 새로워지는 혁명은 아직 한참 멀었고

→ 날로 새롭기는 아직 한참 멀고

→ 날로 갈아엎기는 아직 한참 멀고

→ 날로 거듭나기는 아직 한참 멀고

99


아무래도 새들의 나라에 입국한 것이 틀림없다

→ 아무래도 새나라에 들어온 듯하다

→ 아무래도 새나라에 건너온 듯싶다

→ 아무래도 새나라에 내딛은 듯하다

102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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