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관행 (학력 기재)
바꾸려고 하면 ‘배우다·받다·받아들이다’로 가면서 ‘밝다·반갑다’를 이룬다. 안 바꾸려 하면 ‘배다·배기다·배짱·배째다’로 가느라 ‘배배 꼬이’고 ‘비비 꼬이’는 ‘배틀다·비틀다’로 기운다.
‘학력 관련 서류’를 바라는 곳이 아직 있는 까닭은 어렵잖이 알 만하다. 다들 입으로는 ‘학력차별 철폐’를 말하는 척하지만, 정작 ‘학력차별 철폐’를 이루면, ‘학력 있는 교수·작가’는 ‘적은 강연료’를 받아야 하느라, 이런 굴레가 그대로 있기를 바라기도 하고, 그분들한테는 ‘학력 = 자랑’인 얼개이다.
잘 보면 알 텐데, 숱한 교수·작가는 책을 낼 적에 ‘책날개 글쓴이 적바림’에 “무슨 대학교·대학원·유학 마침”을 첫머리에 적는다. 그분들은 ‘학력 우선’에다가 ‘학력 = 연구성과 보증’이라 여긴다. 그래서 나는 책날개에 ‘학력 적는 짓’을 오래오래 잇는 글쓴이는 즐겁게 “믿고 거른”다. 고작 몇 해밖에 안 다닌 끈을 첫머리에 적는다면, 기나긴 삶을 잇는 동안 그분들 스스로 새롭게 배운 바가 없다는 뜻이거든.
요사이는 ‘제출 서류’에 ‘학력 비공개’로 짤막하게 적어도 된다. 이렇게 해도 받아들이는 곳이 많이 늘었고, 처음부터 아예 안 받는 데가 대단히 많다. 다만, 아직 ‘학력 관련 서류’를 바라는 곳이 있다만, 머잖아 깔끔히 사라지리라 느낀다. 이런 꾸러미를 바라는 곳이 여태 있으면, “저기, 이제 다른 거의 모든 곳은 이런 꾸러미가 따돌림(차별)인 줄 알아서 아예 없애요. 저는 요 몇 해 사이에 이런 꾸러미를 바라는 곳을 오늘 처음 보았어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이런 꾸러미는 이제 없어도 될 테니, 조금 살펴봐 주시기를 바라요.” 하고 한마디를 하면, 꽤 쉽게 사라질 만하리라 본다.
나는 어디에 가서 무슨 자리를 얻어서 이야기꽃을 펴더라도 즐겁게 웃으면서 “저는 무학자에 독학자입니다. 들숲메바다와 풀꽃나무와 해바람비와 우리 아이들이 저를 가르치고 이끌었습니다.” 하고 여쭌다. 거짓말 아닌 참말인걸. 언제나 들숲메가 가르치고, 바다와 하늘이 가르치고, 해바람과 빗물과 이슬이 가르치고, 아이들과 곁님이 가르치고, 풀벌레와 나비가 가르치고, 새와 들짐승이 가르친다. 씨앗 한 톨이 가르치고, 흙 한 줌이 가르친다. 부엌일을 하면서 삶을 새롭게 익힌다. 빨래를 하고 걸레로 바닥을 훔치면서 새삼스레 익힌다. 등짐차림으로 저잣마실을 걸어서 다녀오며 새록새록 익힌다.
우리가 해적이(프로필·강사카드)라는 데에 발자국(학력·경력)으로 뭘 적어야 한다면, “집안일 몇 해 + 아이돌보기 몇 해 + 풀꽃나무 바라보기 몇 해 + 해바람비 읽기 몇 해 + 새소리·풀벌레소리 듣기 몇 해” 같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어야지 싶다. 스스로 삶을 가꾸고 마음을 일구고 살림을 짓고 사랑을 속삭인 나날을 발자국으로 적어야 제대로 해적이라 여길 만하다고 본다. 2025.10.3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