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명석한 두뇌에 많이 배워 높은 자리에까지 오른 양반들이 하는 행동이 왜 이 모양인가.' 의문을 넘어 자괴감이 든다. 흔히 말하는 IQ, 누구보다 똑똑한 머리에 최고의 대학을 나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 월등하다는 우월감. '엘리트'로서의 권위는 인정받아 마땅하다는 자신감. 더 나아가 우월한 자신들이 권력을 휘두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오만함.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단추를 잘못 꿰고 있었던 걸까.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대표실학자로 손꼽히는 정약용의 <정선 목민심서>. 지방의 수령이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반드시 해야할 지침들을 수록해 놓았다. 학창시절 역사수업시간에 계속 강조했던 대목이라 '정약용'와 '목민심서'를 짝짓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그 속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는 봐야 한다.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인데 18세기, 200년 전 저술된 책을 구태여 읽을 필요가 있을까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었다.
태어나면 죽고,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도 있는, 끊임없이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 18세기와 지금이 다르지 않듯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었다. 바로 백성을 대하는 태도였다.
벼슬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두려워할 외(畏)’ 한 글자이다.
의(義)를 두려워하고 법을 두려워하고 상관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마음에 언제나 두려움을 간직하면, 혹시라도 방자하게 되지 않을 것이니, 이로써 허물을 적게 할 수 있다. <정선 목민심서> 52~53쪽
십여 년 전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었다. 신유사옥으로 귀양살이에 올랐던 정약용이 두 아들과 가족,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된 책이었다. 고독하고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줄곧 두 아들이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는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망한 집안의 자손이니 행실을 바르게 하라는 것에서부터 삐딱하게 행동하지(눈알도 함부로 굴리지) 말 것이며 밤낮으로 독서에 매진하라는 등 마치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시시콜콜하게 짚어놓았다.
<정선 목민심서>는 한마디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지방수령 버전이라고 할까? 수령이 부임지로 떠나는 그 순간부터 도착해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과업에 대해 짚고 있다. 첫 부임지로 가는 행장을 꾸릴 때 의복과 안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청렴함을 유지해야 하는지, 백성에게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수령으로서 임금의 명령인 법을 행할 때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일일이, 시시콜콜하게 전하고 있다.
"정약용 이 양반, 은근 잔소리꾼이네?"
유배지에서 지내는 양반이 수령에게 이래라 저래라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그의 심정을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인간을 본디 선하다고 여겼던 정약용, 그는 '백성은 하늘의 적자이고 임금의 백성이고 나라의 근간'으로 여겼다. 해서 자신이 수령으로서 '목민(牧民)', 백성을 위하고 보살피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갇힌 몸이라 행동에 제약이 따르니 '심서(心書)'라고 책제목을 붙인 걸 떠올랐다. 그에겐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마을 수령들이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여겨졌던 건 아닐까. 그의 간절한 바람이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저릿했다.
상사의 명령이 공법에 어긋나고 민생에 해를 끼치는 것이면 굽히지 말고 꿋꿋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109쪽
백성이 곤궁하면 자식을 낳아도 잘 거두지 못하니, 깨우치고 타일러서 우리 자녀들을 보전케 해야 할 것이다. 141쪽
노동력을 부담지우는 것은 신중히 하되 되도록 줄여야 한다.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된다. 229쪽
<정선 목민심서>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법이 유독 한 사람만의 이득과 권력을 이롭게 할 때, 백성보다 권문세가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에 급급할 때, 정약용 그는 뭐라고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