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의 정원 ‘풍월당(風月堂)’ 곳곳에 문학과 미술이 있다. 문학과 미술은 음악의 오래된 지음(知音)이다.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악기로 연주하면서 읊은 음유시인은 악사 겸 시인이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음악가들은 시와 소설을 읽었고, 미술관에 자주 드나들었다.

화가는 음악을 듣다가 떠올린 감정을 그린다. 캔버스에 닿은 선율은 사람, 동물, 식물, 건물로 변신한다. 때로는 절친한 음악가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폴란드에서 온 ‘음악의 시인’ 쇼팽(Frédéric Chopin)의 친구다. 그는 또 쇼팽과 사귀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와도 친분이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다.

풍월당의 카페 ‘로젠카발리에(Rozenkavalier)’는 19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 빈(Wien)의 카페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카페 내부는 19세기 말 유럽에 유행한 유겐트스틸(Jugendstil) 양식으로 꾸며졌다. 유켄트스틸은 아르누보(Art Nouveau)의 독일식 명칭이다.

카페 안에도 풍월당 대표 박종호 명인이 소장한 책들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눈맞춤한 책은 독일의 미술 서적 전문 출판사 타셴(Taschen)이 2017년에 선보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도록집이었다.
* [개정판] 자비에르 질 네레, 최재혁 옮김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2023년)
* [절판] 이주헌 《클림트: 에로티시즘의 횃불로 밝힌 시대정신》 (재원, 1998년)
클림트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교향곡 9번 <합창>에 영감받아 <베토벤 프리즈>라는 거대한 벽화를 그렸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클림트는 황금색을 좋아하는 화가, 관능적인 그림을 그린 에로티시즘의 화가, 여성 편력이 심한 화가로 유명하다. 이렇다 보니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걸작임에도 <입맞춤(kiss)>와 <유디트 Ι>에 비하면 대중의 관심도가 낮은 편이다.
* [개정판] 제러미 시프먼, 김병화 옮김 《베토벤》 (포노, 2025년)
* 노먼 레브레히트, 장호연 옮김 《왜 베토벤인가》 (에포크, 2025년)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맞이한 예술가들은 음악의 성인(樂聖)을 ‘인류의 영혼을 구원한 천재’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환희의 송가(Ode to Joy)’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합창> 교향곡 제4악장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20세기를 반가이 맞이한 빈은 베토벤을 숭배하는 도시가 되었다. 클림트도 베토벤에 경의를 표한 예술가였고, <합창> 교향곡 연주회에 어울리는 벽화를 제작했다.
로젠카발리에를 찬찬히 둘러보면서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을 생각했다. 머릿속에 서울의 책방 이름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카페에서 혼자 서성거리다가 또 한 번 클림트 도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클림트, 클림트‥…클림트!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회현역 지하상가에 있는 헌책방 ‘클림트’로 향했다.

회현역 지하상가에 LP 음반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클림트는 오래된 책과 중고 LP 음반을 같이 판매한다. 책방 문에 책방 주인의 야구 팬심이 붙어 있다. 책방 주인은 프로야구팀 LG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선수 이병규와 박용택을 좋아한다. 두 선수 모두 은퇴했다. 이병규는 현재 LG트윈스 2군 감독이다. 2023~2024년에 삼성 라이온즈 수석 코치, 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박용택은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하상가에 있는 헌책방은 구멍가게와 비슷하다. 가게 안에 책이 엄청 많이 있으면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비좁다. 켜켜이 쌓여서 생긴 책 탑은 천장에 닿아 있다. 이렇게 비좁은 헌책방은 대구역 근처 지하도(굴다리) 헌책방 이후로 오랜만이다.

사방이 책 탑으로 둘러싸인 헌책방에 있으면 어질어질하면서도 책을 잘 찾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집중력도 높아진다. 책방의 책 탑은 개정판에 밀려난 구판 도서들의 무덤이다. 표지가 달라지고, 집 주소(출판사)와 이름(책 제목)도 바뀐 개정판이 나오면 구판 도서는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 품절과 절판은 책의 죽음이다.
* 아서 밀러, 최영 옮김 《시련》 (민음사, 2012년)
*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 《현상학적 심리학》 (한길사, 2021년)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럼의 마녀》는 민음사 ‘이데아 총서’ 일곱 번째 책이다. 작품의 원제는 ‘The Crucible’이다.

지금은 원제의 의미에 맞게 《시련》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다시 출간되었다. 구판과 개정판의 역자는 같다. 《세일럼의 마녀》 바로 아래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심리학 강의》가 있다. 알라딘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희귀한 책이지만,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
클림트에 절판된 철학 도서들이 숨어 있다. 이런 구하기 힘든 책들은 도서관에 있다. 그러나 출간된 지 오래되었고, 대출 횟수가 적은 책들은 사서만 갈 수 있는 창고에 갇힌다. 창고에도 책이 많으면 그중 일부는 폐기 처분 도서로 분류되어 헌책방으로 향한다. 헌책방이 없어지면 절판된 철학 도서를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 발터 벤야민, 최성만 · 김영옥 · 윤미애 함께 옮김 《일방통행로 / 사유 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년)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도서출판 길, 2007년)
* 발터 벤야민, 최성만 · 윤미애 함께 옮김 《브레히트와 유물론》 (도서출판 길, 2020년)
클림트 책방 주인은 철학 도서들이 독자들을 많이 만나지 못하고, 조용히 절판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분은 ‘길 출판사’가 펴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집이 더 이상 절판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출간된 길 출판사의 벤야민 선집은 총 열두 권이다. 이 중에 품절 도서는 2권이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 재정기의 파리 /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황현산 · 김영옥 함께 옮김, 2010년)와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2015년)다. 《브레히트와 유물론》도 한동안 품절 도서였다.
*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년)
* [절판] 발터 벤야민, 최성만 · 김유동 함께 옮김 《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사, 2009년)
벤야민의 글을 선별하여 편집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초판 발행 연도는 1983년이다. 민음사 이데아 총서 시리즈에 속한 대부분 책은 절판되었거나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처음 모습 그대로이며 여전히 건재하다. 이 책에 수록된 벤야민의 글들은 벤야민 선집에도 실려 있다. 그렇지만 오래된 책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가 수록되어 있다.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벤야민 선집에 포함된 책은 아니지만, 벤야민의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절판돼서 아쉽다.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대학 강사가 되기 위한 자격을 얻으려고 《독일 비애극의 원천》 집필에 착수한다. 비애극은 비극과 다른 개념으로 벤야민이 고안했다. 비애극(trauerspiel)은 비애(trauer)와 유희(spiel)가 만나서 생긴 용어다. 벤야민은 독일 바로크 시대의 문학과 예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나온 온갖 문헌들을 수집, 분석하여 비애극의 특징과 형성 과정을 밝힌다.

책방 주인(master)은 책을 읽으면서 철학에 숙달한(master) 분이다. 나는 그분과 20분 동안 철학과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딜레당트(dilettante)다. 책방 주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분이 한 말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견해를 검증하듯이 대화하지 않았다. 나는 정확한 지식보다는 그분의 취향과 관심사를 알고 싶었다.
책방 주인은 내가 책을 고르는 데 방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거듭 사과했다. 나는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헌책방 주인도 책을 좋아하는 독자다. 좋은 책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 책을 찾는 손님을 위해서 큐레이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