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루함이 길어지면 인간은 비루해진다.
지루한 삶에서 오는 권태는 인간을 나태하게 만든다.
* 샤를 보들레르, 황현산 옮김 《악의 꽃》 (난다, 2023년)
*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년)
* 앙투안 콩파뇽, 김병욱 옮김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 (뮤진트리, 2020년)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권태의 섬뜩한 실체를 알고 있었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첫 시집 《악의 꽃》의 시작을 알리는 서문에 해당하는 「독자에게」라는 시에서 권태를 언급한다.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악랄하고, 가장 더러운 놈이 하나 있다!
이렇다 할 몸짓도 없이 야단스러운 고함소리도 없이,
지구를 거뜬히 산산조각 박살내고,
하품 한 번에 온 세상을 삼킬지니,
그놈이 바로 권태! ― 눈에는 본의 아닌 눈물 머금고,
물담뱃대 피워대며 단두대를 꿈꾼다.
그대는 알고 있지,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 위선자 독자여, ― 내 동류, ― 내 형제여!
(보들레르, 《악의 꽃》 「독자에게」 중에서, 황현산 옮김)
그는 권태를 일시적으로 지루한 상태로 바라보지 않았다. 과장된 비유로 보일 수 있겠지만, 보들레르가 노려본 권태는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괴물’이다. 이 괴물은 지구를 박살 내버리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다. 크게 하품하는 권태는 세계를 집어삼킨다.
보들레르는 한가한 생활에도 싫증을 느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자신을 자책했고, 나태를 괴로워했다.
“영원한 불안에 휘둘리는 영원한 한가로움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세요. 마음 깊이 그 한가로움을 증오하면서 말입니다.”
(보들레르, 앙투안 콩파뇽의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 46쪽에서 인용함)
이때 당시 보들레르는 백수였다. 그는 의붓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의붓아버지는 보들레르가 법관(法官)이 되기를 바랐지만, 보들레르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20대 초반의 보들레르는 재산과 땅을 일찍 상속받았지만, 금방 다 써버렸다. 아들에게 실망한 가족은 금치산자 선고 신청을 했고, 보들레르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청년으로 살아가게 된다. 스물여섯 살의 보들레르는 불안을 동반한 끝 모를 한가함을 증오한 청년이었다.
* 파스칼, 김화영 옮김 《팡세: 분류된 단장》 (IVP, 2023년)
* 파스칼, 이환 옮김 《팡세》 (민음사, 2003년)
* 앙투안 콩파뇽, 김병욱 옮김 《파스칼과 함께하는 여름》 (뮤진트리, 2021년)
보들레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지루함과 권태의 위험성을 간파한 철학자가 있었다. 보들레르는 이 철학자를 닮은 냉소주의자였고, 「심연」이라는 제목의 시(《악의 꽃》에 수록되어 있다)에 철학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냉소적인 철학자의 정체는 짧은 글 모음집 《팡세》를 쓴 파스칼(Blaise Pascal)이다. 사실 그는 철학자보다 수학자와 신학자가 잘 어울린다. 파스칼은 이 책에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은 불행하다고 썼다. 인간이 지루함을 크게 느낄 때가 언제일까? 파스칼은 인간이 방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할 때 불행이 시작된다고 봤다.
아늑한 방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쓸쓸한 감옥이 될 수 있다. 너무 한가해도 문제다. 방에 틀어박혀 지내기 싫은 사람은 탈출을 시도한다. 지루함을 달래줄 ‘기분 전환(divertissement)’을 감행한다. 그들은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까지 오락(divertissement)을 즐긴다. 오락에 빠지면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나 파스칼은 기분 전환을 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오락을 즐기는 사람은 지루함과 권태를 못 본 체하거나 감추고 있다.
* 몽테뉴, 심민화 · 최권행 함께 옮김 《에세 1》 (민음사, 2022년)
* 몽테뉴, 심민화 옮김 《에세 2》 (민음사, 2022년)
* 몽테뉴, 최권행 옮김 《에세 3》 (민음사, 2022년)
* 몽테뉴, 뫼니에 드 케를롱 엮음, 이채영 옮김 《몽테뉴 여행기》 (필로소픽, 2020년)
* 앙투안 콩파뇽, 김병욱 옮김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 (뮤진트리, 2022년)
파스칼은 은퇴 후에 즐기는 여가 생활도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를 좋아하지 않는다. 귀족으로 태어난 몽테뉴는 스물네 살에 법관이 되었고 서른 일곱 살에 은퇴했다. 한가해진 그는 자신의 성 안에 있는 서재에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부지런히 쓴 글이 바로 《에세》다. 이 책이 유명해져서 사람들은 몽테뉴를 사색하는 은둔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몽테뉴는 밖에 나가서도 세상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신장결석에 시달린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을 여행했다.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던 몽테뉴는 여행 일기를 남겼다.
교양 라디오 프로그램 <함께하는 여름>을 진행했고, 방송 내용을 책(《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 《파스칼과 함께하는 여름》,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 등)으로 펴낸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앙투안 콩파뇽(Antoine Compagnon)은 《팡세》가 몽테뉴를 반대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말한다. 몽테뉴는 자신을 향해 되묻는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Que sais-je)?” 파스칼의 관심사는 생각하는 자신이 아니라 신이다. 그는 ‘숨어 있는 신’을 알고 싶어했다. 파스칼의 눈에 비친 몽테뉴는 비참한 ‘신 없는 인간’(《팡세》 1부의 제목)이다.
[카페 스몰토크 철학 도서 읽기 모임 지정 도서 (2025년 9월)]
* 고쿠분 고이치로, 김상운 옮김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어떻게 살 것인가》 (arte, 2025년)
* 남태현 《극우의 노래: 한국의 극우, 그들은 누구인가》 (오월의봄, 2025년)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은 남을 돕거나 나를 둘러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한다. 이것은 긍정적인 기분 전환이다. 그러나 비뚤어진 정신으로 타인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극단주의자가 된다.
지루함과 한가함을 철학으로 분석한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는 극우화된 일본 청년들이 ‘긴장 속의 삶’에 익숙해졌다고 진단한다. 극단주의 성향이 강한 청년들은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는다. 그들은 ‘숨어 있는 적대 세력’이 민주주의와 평화를 해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천하태평이다. 자신이 믿는 음모론을 우습게 여긴다. 극단주의자는 초조하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먹고 사는 일이 아니라 정치다. 적대 세력들을 공격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적대 세력 규탄 집회에 참여한다. 그렇게 자신들은 바람직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지루함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는 사람들을 분석한 고쿠분의 견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내 청년의 극우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우 청년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적대 세력은 친북 정치인들과 간첩, 그리고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와 여성이다. 구직에 어려움을 느낀 청년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여성을 위한 정책에 분노한다. 외국인과 여성이 유리해질수록 자신들은 역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불만이 가득 쌓인 청년들은 외국인 혐오와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극우주의자의 논리에 끌린다.
대부분 사람은 이른바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극우 집회에 참석한 노인들을 경멸한다. 태극기를 액세서리처럼 치장한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들을 바라보면 거부감이 느끼고, 애초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버린다. 이러면 노인들이 극우 집회에 참석하게 된 속사정을 알지 못한다. 극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 《극우의 노래》의 저자 남태현 교수는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 집회를 즐기러 오는 노년층을 주목한다.
(태극기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함께 웃으며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서로 동료애를 나누고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은 마치 오랜 친구들이 모인 자리 같았습니다. 한 참석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친구들을 만나려고 와요.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없거든요. 이렇게 친구들도 만나고 자주 볼 수 있어 좋죠.”
실제로 집회 전후의 모습은 아이들의 소풍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풍경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정치적 토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사적인 이야기들이었죠. 몇 년을 매주 함께하다 보니 깊은 우정도 쌓인 모습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년층의 고립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태극기집회는 이들에게 연대와 우정을 쌓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극우의 노래》 중에서, 179~180쪽)
교수가 바라본 태극기부대의 노인들은 집회를 ‘동년배와 함께하는 축제’로 인식했다. 집회에 비속어를 섞어 가면서 정치적인 발언을 거칠게 하는 노인들만 있는 건 아니다. 어떤 노인들은 정치와 관련 없는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혼자 있으면 한가하면서도 지루하다. 한가함을 뒤집으면 지루함이고, 지루함을 뒤집으면 한가함이다. 그래도 우리는 지루함을 더 크게 느낀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데도 지루할 수 있다. 가족과 연인이 함께 있으면 보드라운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꺼칠한 권태로 변한다. 하품을 연신 해대는 권태 괴물을 조심해야 한다. 소리 없는 괴물은 우리를 계속 집어삼킨다. 권태에 잡아먹힌 우리는 기분을 전환하는 재밋거리를 찾는다. 오락이 재미있어서 행복감을 느끼면 권태 괴물의 속은 더부룩해진다. 불편한 권태는 행복한 인간을 뱉어낸다. 오락을 계속 반복하면 지루하다. 이때 권태는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다시 한번 하품할 준비를 한다.
파스칼은 사는 게 재미있어서 지루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을 딱하게 여겼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싸늘한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말로 불행한 사람은 지루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남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것을 따라 한다. 지루함을 해소할 수 있는 오락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오락의 문제점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지루함을 극단적으로 해소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다.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타인을 괴롭힌다. 타인이 즐거워하지 않는 오락(娛樂)은 오락(誤樂)이다. 잘못된 재밋거리(誤樂)다.
가장 위험한 권태 괴물은 지루함을 견딜 줄 모르는 사람에게 오락(誤樂)을 하라고 속삭인다.
이 녀석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괴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괴물이 우리를 닮아서 그런가?


[글 제목이 있는 사진 원본에 붙인 주석] 블룹 몬스터(The Bloop Monster)라는 미확인 괴생명체(Cryptid)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