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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獨子)적인 독자(讀者)
  • 밤보다 긴 촉수
  • 유진 새커
  • 21,850원 (5%690)
  • 2025-10-01
  • : 2,660





4점  ★★★★  A-



















철학(哲學)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리에 밝다(哲). 그들은 꾸준히 숙고한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는 자주 생각할수록 자신의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별이 총총한 하늘’과 그의 마음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주1] 별이 빛나는 밤은 객관적으로 설명 가능한 자연이다. 칸트가 생각하는 인간은 ‘도덕적으로 판정하는 이성의 사례들’을 손에 지닌 존재이다.[주2] 칸트는 자연을 탐구하는 데 유용한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덕 법칙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칸트는 이성을 제외한 자연 탐구와 도덕 탐구를 경계했다. 마음에 이성이 사라지면 미신이 불쑥 자란다. 미신을 집어삼킨 두려움은 멈출 줄 모르고 부풀어 오른다. 미신에 빠진 인간은 사색(思索)하는 능력을 잊어버린다. 얼빠진 그의 얼굴은 사색(死色)으로 뒤덮여 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유지하면 진실로 둔갑한 오류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상식에 벗어난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고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서양 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일어날 이유가 있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듯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철학 원리를 ‘충족 이유율’이라고 한다. 충족 이유율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처음으로 주장했으며 라이프니츠(Leibniz)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관심을 보인 철학 논제였다.[주3]


이성으로 무장한 철학자들은 탄탄한 논리적인 전략을 내세워 미신과 광기를 무찔렀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물과 사건은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다. 승승장구를 거듭한 철인(哲人) 군단은 진리와 학문의 수호자가 되었다. 철인 군단은 문학과 예술마저 정복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데아(idea)를 찾느라 바쁜 플라톤(Plato)을 제외한 철인들은 문학과 예술을 향해 진격했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철인은 문학 작품을 철학적으로 독해했다. 예술을 감상할 줄 아는 철인은 아예 미학과 예술 철학을 만들었다.







문어발식 확장(과학 철학, 종교 철학, 정치 철학, 페미니즘 철학 등)에 성공한 철인 군단이지만, 명석한 그들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적수가 있다. 철학의 적수는 바로 ‘공포 문학’이다.


《밤보다 긴 촉수》는 독특한 철학책이다. 이 책은 <철학의 공포>라는 연작의 세 번째 책이다. 연작 첫 번째 책은 2022년에 출간된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다. <철학의 공포> 연작을 기획한 저자는 철학도를 도발한다. “나는 공포 소설을 철학 작품으로 오독(誤讀)할 것이다.” 저자는 그전에 이미 <철학의 공포> 두 번째 책(국내 미출간)에서 ‘철학 작품을 공포 작품으로 오독하기’를 시도한 바 있다.






* [절판]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홍인수 옮김, 《공포 문학의 매혹》 (북스피어, 2012년)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말도로르의 노래》 (문학동네, 2018년)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이동신 옮김, 《러브크래프트 걸작선》 (을유문화사, 2024년)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정진영 · 류지선 옮김, 《러브크래프트 전집 1~6》 (황금가지, 2009, 2012, 2015년)

 

* 단테 알리기에리,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박상진 옮김, 《신곡》 (전 3권, 민음사, 2007년)

 

* 단테 알리기에리, 귀스타브 도레 그림, 김운찬 옮김, 《신곡》 (열린책들, 2022년)





저자가 제안한 독서는 공포 문학 작품을 철학책으로, 공포 문학 작가를 철학자로 전환해서 읽는 독해 방식이다. 저자가 철학적으로 오독하기 위해서 가져온 작품들이 흥미롭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 거대한 괴물들이 나오는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단편소설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의 지옥 편, 도저히 인간이 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난해해한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의 《말도로르의 노래》.


 

‘철학의 공포’라는 듣도 보도 못한 표현을 마주한 철학도는 의아할 것이다. ‘공포’를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고?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공포’를 어떤 상황에서 느끼는지 알아야 한다. 공포 문학의 거장인 미국의 소설가 러브크래프트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이 ‘미지에 대한 공포’라고 말한다. 








우리는 낯선 것을 만나면 의구심을 품는다. 의구심은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우리는 낯선 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 두려움을 가까스로 추스르면서 이성적 판단을 시도한다. 두려움을 해소하려면 그것을 알아야 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 하지만 공포 문학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미지의 대상을 만나면 이성이 마비된다. 그들은 두려움에 압도당한다. 초자연적 상황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못하면 충족 이유율을 의심하게 된다. 따라서 충족 이유율을 믿고 따른 사람들은 누구도 설명하지 못한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하면 ‘철학의 공포’를 느낀다.


유령과 괴물이 출몰하고 이상야릇한 환상이 가득한 공포 문학은 시시하지 않다. 공포 문학은 여전히 이성의 힘을 믿고, 이성에 의한 진보를 확신하는 우리의 오만한 낙관론을 의심한다. 공포 문학은 완벽해 보이는 이성과 충족이유율에 ‘철학적 의문’을 던진다. 이성과 충족 이유율은 허깨비다. 


철학은 설명하기 힘든 공포를 만나면 잠시 얼어붙는다. 그 순간 철학은 진격을 멈춘다. 철학이 멈추는 날은 철학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숙고한 것들을 가다듬는다.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고, 질문과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철학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해서 철학의 패배, 철학 무용론, 비관론을 부르는 것은 섣부르다. 철학을 내팽개치고 우리의 정신을 돌보지 못하면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된다.









[주1] <실천이성비판> 맺는말(맺음말)의 첫 문장. 임마누엘 칸트, 김석수 · 김종국 옮김 《도덕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한길사, 2019년), 353쪽.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실천이성비판》 (아카넷, 2019년, 개정 2판), 331쪽.

 

[주2] 《도덕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김종국 번역) 맺음말, 355쪽.


[주3]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배선복 옮김, 《모나드론 외》 (책세상, 2019년), <모나드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김미영 옮김,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나남출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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