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점 ★★★★ A-
과학상자는 공예를 좋아하는 어린이가 받고 싶은 선물이다. ‘열려라, 과학 나라!’ 장난감을 만들고 싶은 어린 마음이 주문을 외치자, 과학상자가 열린다. 상자 속에 여러 개의 부품이 있다. 어린이는 고사리손으로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만의 장난감을 만든다. 과학상자에 들어간 어린이가 장난감을 만들면, 과학상자는 발명가와 공학자를 만든다. 일 년 중 과학상자가 제일 많이 열리는 달은 과학의 날이 있는 4월이다.

어린 과학자와 발명가들을 만날 때마다 활짝 열어준 과학상자가 43년 만에 닫는다. 과학상자를 잠그는 날은 1월 24일이다. 24일이 지나면 과학상자를 영원히 열 수 없다.
과학책은 종이로 된 과학상자다. 과학책으로 들어간 독자는 공학자처럼 기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까다로운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과학책이 기계 만드는 법과 실험 과정을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종이 과학상자 속에 들어있는 과학은 씩씩하다. 활발한 과학은 자신을 어려워하는 독자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다. 반면 오랫동안 실험실에서 지낸 과학은 소심하다. 부끄럼쟁이 과학은 독자를 만나는 일을 어려워한다. 실험실에 갇힌 과학이 유일하게 친한 사람은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과학자다.
실험실에서 태어난 과학은 갓난아기다. 아기 과학의 어버이는 과학자들이다. 아기 과학은 말랑말랑한 가설이다. 어수룩한 과학은 실험실 안에서 아장아장 걷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한다. 과학이 어른이 되려면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과학자들의 정교한 관리(검증)를 받아야 한다. 어버이 과학자의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과학은 커서 고집이 센 ‘도그마(dogma)’가 된다. 명성에 집착한 과학자는 과학을 악용한다. 이들은 자신의 실험실에서 태어난 과학이 잘못되었는데도 무조건 옳다고 주장한다. 실험실 생활을 청산한 어린 과학은 어버이의 손에 이끌려 ‘글’을 만난다. 과학은 글을 만나는 순간 ‘말하는 과학책’이 된다.
기존 과학사의 주인공은 현미경, 망원경, 대형 강입자 충돌기와 같은 실험 기구와 과학자의 이름이 붙여진 법칙이다. 《책을 쓰는 과학자들: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의 주인공은 과학사의 조연을 맡은 과학책이다. 이 책을 펼치면 실험 기구를 다루는 과학자가 아니라 펜을 쥔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2천 5백여 년 동안 과학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글이다. 과학자는 자식 같은 과학 지식이 어떻게 자랐는지 기록했다. 과학책은 초보 단계인 가설에서 시작된 과학이 어엿한 지식이 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앨범이다. 책은 지식을 보관하는 종이 상자다. 과학자들이 종이 과학상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과학은 실험실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종이 과학상자 안에 과학자의 이름도 들어 있다. 과학자는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면 책 한 권을 써서 남겨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과학책은 과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생애를 말해주는 산증인이 된다.

최초의 과학책은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그리스, 중국, 인도, 중동 지역에서 나왔다. 과학상자 1호(책의 1장)는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쓴 문서다. 비록 우리가 아는 책의 형태와 다르지만, 보존이 잘 된 과학 문헌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랍 출신 과학자들은 잊힐 뻔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저서를 발굴했다. 그들은 그리스 과학자들의 저서에 드러난 부정확한 지식을 솎아냈고, 빈자리에 자신들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채워 넣었다. 중동에서 성장한 수학과 의학은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과학상자 1호는 과학자들만 읽을 수 있는 기록물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과학자들은 라틴어로 글을 썼다. 라틴어는 지식인들의 공통 언어였다. 초창기 과학상자는 대중 친화적 과학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대중도 읽을 수 있는 과학상자 2호(책의 2장)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1632년에 출간된 『대화: 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관하여』를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썼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는 1834년에 만들어졌다. 1834년 이전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자연철학자’로 불렸다. 19세기에 대중을 위한 과학상자 3호(책의 3장)가 많이 나왔다. 과학상자 3호에 속하는 과학책 중에 현재 ‘고전’으로 알려진 책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과학상자 3호는 ‘진화론 논쟁’을 촉발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이다. 소탈한 성격의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는 자신의 직업을 과학자라기보다 ‘과학 전문 강연가’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과학 강의를 진행했는데, 강의 주제는 촛불이 붙은 양초였다. 패러데이는 과학 강의를 요약한 『촛불의 과학』을 썼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과학상자 4호(책의 4장)를 열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날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론은 절대불변의 진리로 극진하게 대접받은 뉴턴(Isaac Newton)의 고전 역학과 유클리드(Euclid) 기하학을 뒤집었다. 과학상자 5호(책의 5장, 마지막 장)는 우리에게 친숙한 과학 스테디셀러다.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시간의 역사』 등이 있다.
《책을 쓰는 과학자들》에 언급된 대다수의 과학자는 남성이다. 저자는 여성 과학자들의 글쓰기를 허용하지 않은 ‘과학의 불평등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출판물로 인정받은 책에 중점을 두고, 과학적 글쓰기의 역사를 살핀다면 글 쓰는 여성 과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여성 지식인들은 남자 이름으로 느껴지는 가명을 내세워 책을 썼다. 그리고 동료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지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여성 과학자들의 편지, 일기, 판매 목적이 아닌 기록물 속에도 과학이 있다. 저자가 강조한 대로 글이 과학을 만들었다면, ‘책이 아닌 글’에도 주목해야 한다. 실험실이라 할 수 없는 다락방. 그곳에, 과학에 미친 여자들이 살았다. [주1]
《책을 쓰는 과학자들》은 단순히 과학책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아니다. 저자는 과학책들의 단점과 한계까지 알려준다. 알프레트 베게너(Alfred Wegener)는 『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책을 써서 대륙이동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지질학자들은 거대한 땅덩어리가 이동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자는 베게너가 대륙의 이동 속도를 과장했으며 지질학자들이 이해할 만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의 『이중 나선』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지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왓슨의 글쓰기를 칭찬하면서도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전하는 승리의 이야기’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조만간 장난감을 만들 수 있는 과학상자가 사라지지만, 종이 과학상자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책은 살아 있다. 하지만 과학 지식을 저장하는 종이 과학상자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 있지 않은 종이 과학상자가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유사 과학이 담긴 종이 과학상자의 ‘유사품’도 있다. 과학책을 ‘객관적인 책’이라고 믿는 것은 과학을 ‘가치중립적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과학은 반증과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학문이다.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의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학 지식의 한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런 과학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잘 만든 과학책은 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독자를 배려할 줄 안다. 그리고 난해한 과학 지식을 최대한 쉽게 풀어 써서 알려준다. 하지만 오류로 확인된 과학 지식을 걸러내지 못할 때도 있다. 과학자들은 기존의 과학 이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글을 썼다. 글이 있어서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의 도전적인 글쓰기 덕분에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과학책은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독자를 위해 항상 열려 있다.
<cyrus가 쓴 주석과 정오표>

[주1] 19세기 여성 문학사를 정리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함께 썼음, 박오복 옮김, 북하우스, 2022년)의 책 제목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 254쪽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한 화학자가 화학 결합을 자세히 밝혀내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로 다른 원소가 연결되어 더 큰 구조를 이루고 화합물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낸 것이다. 1901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나[주2]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역사상 네 명뿐인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된 라이너스 폴링이 그 주인공이다.
[원문, 201쪽]
Meanwhile, on the other side of the Atlantic, an American chemist was making fundamental contributions to understanding the chemical bond, the mechanisms by which different elements link together to from larger structures and compounds. Born in Portland in 1901, Linus Pauling was one of only four people to win two Nobel Prize-in his case, in Chemistry and the Peace Prize.
[주2]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Portland)에서 태어났다. ‘폴란드(Poland)’는 오역이다.
* 264쪽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은 『침묵의 봄』 이전에 해양 생물에 관한 저서를 두 권 썼고,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주3]
[주3] 『침묵의 봄』은 살충제 DDT의 위험성을 지적한 과학책으로, 환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침묵의 봄』이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의 대표작으로 많이 소개되면서 바닷속 생물을 주제로 한 카슨의 과학책이 묻히는 편이다. 『침묵의 봄』에만 주목한 저자는 ‘해양 생물에 관한 저서 두 권’의 제목을 언급하지 않았다.
카슨의 첫 번째 책은 1941년에 출간된 『바닷바람을 맞으며』(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2017년)다. 1951년에 두 번째 책 『우리를 둘러싼 바다』(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18년)가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