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에밀 시오랑을 기억하며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팔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알라딘 중고서점 직원들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뭐랄까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낙서의 유무, 책 자체의 손상 정도, 구입여부(증정품은 제외되는 것으로 알고 있음), 구간과 신간, 알라딘이 보유하고 있는 동일 서적의 양 등이 해당 기준으로 보인다. 더 많은 기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잘 모르겠으니 일단 이 정도. 물론 나는 지금 알라딘의 서적 매입 기준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학을 맞아 어떤 퍼포먼스라도 하고 싶어 책장을 정리하고 더는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골라냈다. 책을 골라낸 후 알라딘에 팔 수 있는 책과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면 좋을 책을 나누는데, 기증으로 분류된 책들은 대체로 출판사에서  증정받은 책 혹은 선물로 받았으나 내 취향과는 먼 책들, 그리고 시집들이다. 기증에 해당하는 도서들은 내가 구매하지 않은 책이니 나도 그냥 내놓는게 자연스러운 것 같고, 시집이 기증물품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건 정말 개인적인 이유이지만, 시가 돈으로 환산되는 어떤 느낌이 싫어서다. 쓰고 보니 더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여튼 그렇다. 그렇게 분류를 하고 나니 알라딘에 팔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았다. 아참 이번에는 시집 한 권도 팔았다.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시집은 팔아도 될 것 같았다. 시인을 향한 나의 복수는 이렇게 극도로 쪼잔했다.

 

그렇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팔고, 천천히 알라딘 서가를 둘러보니, 오호~ 반가운 책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놀랐던 것은, 책 안쪽에 저자의 친필로 가늠할 수 있는 메모가 있었고, 그 메모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것. 그런데 이 책을 받은 사람은 왜 팔았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알라딘은 이런 메모가 있는 책을 매입하나? 그것도 궁금했다. 그래서 망상에 가까운 공상으로 나는 뭔가 이 책이 내게 발견된 이유를 애써서 찾고 싶어졌다. 혹시 아니?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따위에 내몰린 것이.........

 

그렇게 완벽한 몰입의 상태로 책을 다 읽어갈 무렵 나는 이 책이 알라딘 서가에 꽂혀있는 이유를  발견했다. 단서는 저자의 글에서 찾았다.

책에서 읽은 다른 이의 말을 나의 언어로 둔갑시켜 차용하지 마세요. 다른 이의 말을 빌려서 내 욕망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런 좋은 말들은 듣고 난 뒤 씹어서 뱉어 버리세요.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도 여러분의 말이 아닙니다. 읽고 나서 버리던가, 남을 주던가, 아무튼 몸 밖으로 뱉어 버리세요(p.267) 

 

오호~이렇게 자연스럽게 멋있는 사람들을 보았나. 순전히 내 추측에 추측을 더했지만, 정말 저 말 때문에 책의 주인이 이 책을 팔았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퍼포먼스인지.  그리고 기계적인 줄 알았던 알라딘 도서매입 직원의 작은 실수(?) 또한 얼마나 즐거운 퍼포먼스인지. 인간이 그리는 무늬들이 이렇게 재미나다니. 정말 별 일도 아닌 일로 혼자 키득거리는 나는 이 밤이 참 좋네.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오랜만에 몰입하니 사는 일이 재미있네요. 정말. 

 

아참, 엄한 소리만 하다가 책 이야기를 못했다. 글을 읽으면서 EBS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현생인류의 어떤 한 종족의 남성이 야생에서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모습. 조용히 손에 쥔 연장을 꽉 움켜잡고 일격을 가하려는 모습. 눈빛에서 느껴지는 결기와 그 민첩한 손동작. 저자의 글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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