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9박11일 일정으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인근의 몬세라트와 시체스, 토사 데 마르와 지중해에 위치한 마요르카 섬까지 둘러보는 일정으로, 가우디와 바다를 컨셉트로 즐겁게 돌아다녔다.
이때 톱니 모양의 몬세라트 산을 트레킹했는데, 푸른 하늘과 대비된 기암은 그 분위기만으로 우리를 압도했었다. 나를 둘러싼 거대한 바위는 크기는 물론이고 모양까지도 사람의 형상과 비슷해 마치 천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신들의 모습 같았다. 속세에 찌든 우리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고, 나의 속마음까지 꽤 뚫어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얼마 후, 창비에서 한 책의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말에 신청했는데, 책을 받고 보니 중학교 1학년 호진이가 할머니를 따라 엄마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는 내용이었다. 앗,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얼마 전에 다녀왔던 몬세라트도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에 속한다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스페인 서부,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800km 길이의 도보 여행길이지만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다른 지방에서 출발하는 루트도 있다고 했다. 바르셀로나를 출발해 몬세라트를 지나는 까탈란 루트인데, 내가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기라도 한 것 같이 반갑고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호진이의 말동무가 되어, 스페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동행하게 되었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겠다고 경비까지 마련해 놓은 할머니(조순례)를 따라 호진(신호진)과 엄마(임봉선)는 프랑스 생장으로 떠난다. 여행이란 것이 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즐겁고 순탄했지만 피로가 누적되고 할머니가 다치면서 위기가 닥쳐온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가 암 환자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행을 계속해야 할지, 여기서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호진이가 활동하고 있는 '여자친구'(여행하는 자전거 친구)의 도움으로 '당나귀'라는 이름의 삼륜 자전거를 만들게 되고, 이 자전거를 타고 순례길을 계속한다.
나도 여행을 좋아해 땅끝에서 강화도까지 도보여행을 시도하고,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일주와 부산에서 삼척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나흘 동안 지리산을 종주하거나 울릉도를 혜집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사흘 이상의 장거리 여행, 그것도 도보나 자전거 여행을 떠나 본 사람은 알리라. 출발 전에 가졌던 낭만과 기대는 길어지는 여행 속에 피곤과 짜증으로 쌓이고, 먹는 것이나 씻는 것이 부족하다 보니 행세는 거의 노숙인처럼 변해 간다. 갈 길은 멀지만 계획은 어긋나고 의견도 분분해진다.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았던 가족과 친구는 거추장스러운 짐이나 방해꾼처럼 변해버린다.
그 어려움을 알기에 호진이의 가족 여행이, 자전거 여행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결국에는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는, 그래서 해피엔딩이 될 거라고 예상은 되지만, 매 페이지마다 담겨있는 고된 여정과 그 속에 남아있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여행이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접하거나, 먼 이국땅에서 멋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행이 갖고 있는 조금은 본질적인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행이 고되고 힘들수록, 일정이 길고 팍팍할수록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힘들고 극한으로 치닫게 되는 어려움 속에 말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각은 줄어든다. 오히려 오랫동안 감추어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저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들이 하나씩 고개를 쳐들며 튀어나온다. 그때 왜 그랬어? 꼭 그랬어야만 했니? 라며 되물으며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마저도 들지 않는 고요함에 이르게 되고, 자신의 발걸음, 땀방울, 심장 소리에 깨어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이것이 진정한 여행임을 알게 된다.
호진이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던 엄마의 숨겨진 이야기이자, 그런 딸의 꿈을 펼쳐주지 못한 미안함과 인생의 끝을 향해가는 나이에 세상의 끝을 걷고 싶은 할머니의 이야기인 샘이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고 싶은 호진이 자신의 바램이지 싶다.
그래서 호진이와 엄마, 할머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외부적인 여행을 통해, 자신 속에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자기로부터의 순례를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등이 우리의 이정표였고, 우리의 뒷모습이 뒤따라오는 순례자들의 이정표였다. 우리가 걷는 대로 길이 만들어졌다."(p196)"
얼마 전, 내 개인 블로그와 유튜브에 지난 스페인 여행의 영상을 정리해 올리면서 당시에는 놓쳐버린 많은 이야기를 새롭게 되새김하게 되었다. 몬세라트 트레킹은 물론 140년째 만들어지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뜨거운 지중해에서의 바다수영, 쇼팽의 빗방울 행진곡과 함께 둘러본 발데모사... 이 모든 것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해지며 즐거운 여행 후유증을 즐겼다.
인생은 여행이고 순례길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통해, 책을 통해 인생을 음미하고 나를 되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