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ldg0226님의 서재
  • 사나운 애착
  • 비비언 고닉
  • 13,500원 (10%750)
  • 2021-12-22
  • : 6,544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으면서 여름밤 뉴욕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저녁을 먹고 사람들이 거실에 둘러 앉아 있다. 열린 창문으로 거리의 소음이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비비언 고닉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책의 형식은 단순히 형식에만 그치지 않는다. 형식은 곧 내용이다. <사나운 애착>은 일단 형식에서부터 너무나 독창적이다. 쉰을 앞둔 비비언 고닉은 여든이 된 엄마와 함께 뉴욕 거리를 걷는다. 거리를 걷다가 마주치는 사람들과 풍경들은 자연스럽게 두 모녀가 같이 경험했던 과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렇게 현재 두 사람이 걷고 있는 뉴욕의 맨해튼과 과거 두 사람이 살았던 뉴욕 브롱크스가 교차한다.

 

이 책에는 장 구분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비언 고닉이 쓴 문장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조차 없다.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 점이 다소 당황스러웠다. 평소에 한 장씩 끊어서 읽는 것을 좋아하던 터였다. 그러나 이내 걱정이 사라졌다.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퇴장하는 스토리인데다가 장 구분까지 없지만 이 책은 독자를 결코 혼자 헤매게 놔두지 않는다. 비비언 고닉의 능숙한 솜씨와 결코 잊히지 않는 인상적인 캐릭터들(특히 비비언 고닉의 엄마와 ‘네티’는 압권이다) 덕분이다.

 

장 구분이 없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모녀가 거리를 산책한다는 책의 형식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 책을 읽다보면 지금 읽고 있는 페이지 수가 거리의 번지수처럼 느껴진다. 130페이지를 읽고 있으면 130번지를 거닐고 있는 것 같고, 34페이지를 읽고 있으면 34번지를 걷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해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재미있다는 점이다. 뉴욕의 거리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누가 읽어도 이 책은 훌륭한 오락거리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재미를 주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너무나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인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려낸다. 원하는 만큼 행복하게 살지 못한 엄마(여기에는 여성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이 큰 몫을 차지한다), 엄마의 우울 속에 자라난 딸, 딸이 어른이 되어 인생의 모험을 즐길 때마다 기쁨과 동시에 질투를 느끼는 엄마... 세상에서 가장 비슷하기에 가장 깊숙하게 찌를 수 있는 모녀 관계가 그려진다.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야.” (p.305)

 

비비언 고닉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고독과 소외와 우울을 낱낱이 적어낸다. 그렇게 기억함으로써 엄마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너무나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쳤던 엄마의 모습을 재현해냄으로써 한 여성의 삶을 고스란히 독자들과 공유한다.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라는 문장처럼, 기억함으로써 엄마를 사랑해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떠올랐다. 일단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 자체가 <이터널 선샤인>을 연상하게 했다. 이 책을 읽다가 <이터널 선샤인>에서 과거가 현재를 뒤따라오면서 잡아먹는 것 같은 장면이 생각났다. 또 <이터널 선샤인>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더더욱 이 영화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사나운 애착>과 <이터널 선샤인>에는 차이점도 있다. <이터널 선샤인>이 망각을 통해서 기억으로 나아간다면, <사나운 애착>은 기억을 통해서 망각으로 나아간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워보려고 하지만 지워지지 않으면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나운 애착>의 비비언 고닉과 엄마는 끝끝내 모든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묵은 감정들을 비로소 망각해낸다.

 

앞으로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올 비비언 고닉 선집이 기대된다.

 

* 이 글은 출판사 글항아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