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좋아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대상이 적잖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입을 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실비나 오캄포의 이 소설집은 20대 후반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한 소설은 {연인 속의 연인}이다. 이마를 맞대고 누워 잠들기 전까지 번갈아 이야기를 만들어 속삭이는 커플. 정확히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 이미지를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이게 낭만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낭만일 수 있을까. 다른 수록작들도 그렇지만 단편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그녀에게 꿈 얘기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압축적인 한 문장(이자 한 문단)으로 플롯을 한 방에 정리해버리는 작가의 대범함을 보라.
{연인 속의 연인}만큼이나 낭만적인 또 다른 작품은 {케이프}다. 분량은 아주 약간 더 길다. 해변 관광지라는 배경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더해주는 가운데, 우리(화자)는 케이프와 페도라를 만나고, 페도라와 헤어졌다가 페도라와 다시 만나게 된다.
윤회. {케이프}를 끝까지 읽고 충격을 느끼는 이유는 [아이 오리진스]의 엔딩과 정확히 똑같다. [아이 오리진스]의 엔딩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라디오헤드의 {Motion Picture Soundtrack}은, 정말 이 노래 하나를 틀려고 장편영화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적절했고,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곤 한다.
페도라라는 괴짜 같은 인물 자체도 오늘날 독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윤회를 증명하기 위한 기분 좋은 자살. 그런 걸 실행할 사람이 과연 현대사회에 있을까? 페도라의 정신적 취약함은 작중에 극히 간접적으로 묘사되며, 거기서 현대의학의 관점으로 정신질환의 양상을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누구도 페도라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내게는 두 단편이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보니 다른 수록작들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 않다. 두 작품 외에는 카나리아라는 매개로 사랑의 복수를 하고 속죄하는 과정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속죄}도 인상적인 수록작이었다. 책의 마지막 작품 {충동적으로 꿈꾸는 아이}는 {연인 속의 연인}에서 다룬 꿈, {마구쉬}에서 다룬 점쟁이를 모두 소재로 다루지만, 다른 몇몇 엽편과 마찬가지로 극적인 플롯은 없다. 한편 {담배 연기로 만든 반지}은 뭔가 황순원 {소나기}의 실비나 오캄포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읽어보면 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묶은 책은 아니나 문학사회학 혹은 외재비평의 방식으로 보면 지배 질서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 이건 역자 해설을 참고.
국내에 소개된 실비나의 다른 작품으로는 [탱고](문학과지성사, 1999)에 수록된 {울리세스}가 있다(알라딘 상품페이지에는 ‘올리세스’로 잘못 등록되어 있다). 전집이 번역된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