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적잖은 일본인은 일본 제국이 침략 전쟁을 벌였다고 인정하지 않을까요? 전쟁을 일으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괴롭힌 일을 어쩌면 그리 쉽게 잊었을까요?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기들도 전쟁 피해자라고 우기는 일본인들의 저의는 무엇일까요? 일본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정신 의학자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는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중국 등지에서 복무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해,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일본인들의 물구나무선 논리, 그 밑바닥에 깔린 심리를 분석한 책인 『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원제는 '戰爭と罪責')을 펴냈습니다.
글쓴이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A급 전범들 아래에서 전쟁을 직접 수행한 B급 전범이나 C급 전범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범'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다가 '인간'으로 되돌아왔는지 알아내고자 그들이 걸어온 삶을 성장 과정부터 하나하나 되짚어갔습니다. 전범들이 글쓴이에게 털어놓은 죄들은 하나같이 큰 충격을 줍니다. 이를테면 중국인 부하에게 '염라대왕'이라고 불린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근처 상사아구코우(上下峪口) 마을에서는 농민 8명을 빨간 술이 달린 창으로 엉덩이를 찔러 죽였다. 3명을 그가 찔러 죽이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흉내내도록 했다. 또 원시현 헝쉐이진(橫水鎭)에서는 남자 한 사람을 고문한 뒤, 마차 뒤에 밧줄로 묶어 질질 끌고다녀 죽게 했다.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음경을 자르거나, 물고문으로 부풀어오른 배를 발로 짓밟는 고문도 즐겼다. 또 비위애현(泌源縣) 정중(正中) 마을에서는 겁에 질려 굴 속에 숨어있는 여자와 아이 열두 명을 찾아내, 마른풀로 태워 죽였다. 그가 죽인 중국 농민은 특별군사법정에서 기소된 사건만 해도 111명이다. 그 자신은 200명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염라대왕이 따로 없을 뿐더러, 본인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일본군 장병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하루아침에 포로 신세가 됩니다.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습니다. 죄책감은 없었습니다. 일본군 포로들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고 자기들은 높으신 분들이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그런 자기들을 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며, 되레 불만을 품었습니다. 만주 사변(1931)과 중일 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 전쟁(1941)으로까지 이어지는 '15년 전쟁'이 침략 전쟁이었음을 부인하는 논리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왔던 것입니다.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을 참수하려는 일본군의 모습(위키백과)
그러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이인자'인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는 일본군 포로들에게 관대 정책을 베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포로들을 고문하거나 폭행하는 따위의 가혹 행위는 전혀 없었고, 포로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밥을 더 주고, 아프다고 하면 귀한 약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당시 웬만한 중국 인민들보다 일본군 포로들이 더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을 벌레 보듯 하며 멋대로 죽인 자기들을 손님처럼 따뜻하게 보살피는 중국 지도원들의 태도에 일본군 포로들은 크게 당황합니다. 처음에는 전범이 된 게 억울해서 허세를 부리며 반항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림을 느끼며, 하나둘씩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합니다. 이른바 탄바이[坦白, 죄행의 고백]였습니다.
"리우 반장은 싱긋싱긋 웃으며, 우리들의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눈물이 넘쳐흘렀다. 스스로도 주체할 길 없었다.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휘청휘청 리우 반장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양손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꿇었다."
전범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는 능력을 겨우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아직 그것은 머리로만 생각해서 나온 결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죄가 아니었지요. 이들이 쓴 반성문을 읽으면, 설명과 분석이 너무 많아서 반성문이라기보다 마치 보고서를 보는 듯합니다. 오랫동안 군국주의 문화에 젖어 감정이 마비된 이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가 죽으면서 느꼈을 슬픔과 아픔은 추상화되어 희미하게 다가왔을 뿐이고, 원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중국인들이 보여 준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전범들이 죄를 자각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중국 정부는 전범들의 인죄(認罪, 죄를 인정함)를 받아들여서 한 사람도 사형하지 않고,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약 8년에 걸쳐서 일본군 포로들을 모두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는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을 세뇌된 빨갱이로 낙인찍었습니다. 귀환자들은 자기들이 꺼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본 사회의 공감력 결핍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악명 높은 731 부대에서 생체 해부를 해서 전범이 된 군의관 유아사 겐[湯浅謙]은 패전 후 11년 만에 본 동료 군의관이 생체 해부를 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에 놀라서 일본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유아사를 비롯한 귀환자들은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을 비슷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옛날에 마음속에서 사라진 '슬픔을 느낄 힘'을 되찾은 것이지요. 귀환자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평화 운동에 앞장섭니다.
명령자가 시켜서 억지로 한 전쟁이 아니라 스스로 한 전쟁임을 뒤늦게 깨닫고 실행자로서 자기가 지은 죄를 짊어지고 사는 귀환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일본인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전후 일본 사회는 경제 발달로 풍요로웠지만, 죄의식을 억압하고 공격성을 강화하는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글쓴이는 "직접 전쟁에 관여한 자를 모두 우순 전범관리소에 넣는 것 이외에는, 표면적이나마 그들 일본인을 바꿀 길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라며 절망감을 드러내면서도, 지금이라도 전후 세대는 그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무엇을 했는지 묻고 알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는 '강한 인간(책에서 자주 나오는 '강함'이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쓰임새와 다르게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습니다)'이 되기보다는 울고 웃을 줄 아는 '느끼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 세대가 숨겨왔고 때로는 폭력으로 왜곡시켜온 침략전쟁의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음침한 일이다. 그 음침함은 사실인 자학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려 했던 아버지 세대의 자세로부터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 음침함을 청명하게 벗겨내지 않는 한, 감정의 풍요로움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의 풍요로움이 없는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로 연행하고 학대하고 죽인 데 대해서도, '듣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하느냐 마느냐, 보상액을 얼마로 하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러면 눈을 돌려서 우리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는 이 책을 번역한 서혜영 씨의 말대로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 자리에 앉히는 데 익숙하지만, 과연 그럴 수만 있을까요?
윤해동 교수는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에서 "제국 일본 속에서 이등국민의 가능성을 엿보던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자로서의 욕망을 가슴속에 감춘 '새끼' 제국주의자"였다며, 이런 '새끼 제국주의자'들을 낳은 "식민지 분열 현상은 해방 후 민간인 학살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현대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역사임을 말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국민 보도 연맹 사건(1950)이나 거창 사건(1951) 같은 해방 후 한국 전쟁 시기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잘 알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데,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침묵을 깨고 슬픔을 느낄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군국주의 일본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은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2014년 9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