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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하나둘 올라오는 연말결산 페이퍼를 감탄과 부러움-재밌겠다, 나도 하고 싶다!-의 눈으로 지켜보던 지난 연말이 엊그제 같은데, 금세 1년이 지나가고 내가 그 페이퍼를 쓸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연말결산 못 해도 되니까 그냥 제 1년 다시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되겠죠? 흑흑. 마음 같아서는 잠자냥 님처럼 책마다 책에 대한 설명과 훌륭한 점을 들어 요목조목 적어내고 싶지만 그건 능력 부족으로 포기했다. 직전에 읽은 책 100자평 쓰는 것도 힘들어하는 인간이 몇 개월 전에 읽고 희미한 감상만 남은 책들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을 리가.... 그런 능력을 가질 순 없으니 그런 능력을 가진 분을 가지기로 했다.


여하간 그렇다고 제목만 줄줄이 나열하면 의미 없는 심심한 페이퍼가 될 것 같으니 책마다 상을 주기로. 읽은 책 목록을 쭉 보면서 특히 좋았던 책들만 추리고 추리니까 소설 8권, 비소설 12권이 남았다. 20권 전부 올해 내게 어떤 식으로든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다. 순서는 순위가 아니라 단지 읽은 순서이며, 올해 읽기가 재독이었던 책들은 이 페이퍼에서 제외했다.






소설 부문




















올해의 재회상: 크리스티앙 보뱅, <가벼운 마음>


진정 가벼운 마음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다면.



















올해의 내취향상: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완전 내 취향이야!


















올해의 소설상: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


소설 중에서 딱 한 권만 꼽자면.


















올해의 지팔지꼰상: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지 팔자 지가 제대로 꼬는 골 때리는 게으름뱅이가 등장한다....

















올해의 재미상: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존나 재밌음.


















올해의 난줄상: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주인공이 나인 줄.


















올해의 언니상: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


사강 언니를 만났다!



















올해의 캐릭터상: 에마뉘엘 보브, <나의 친구들>


얘도 골 때리는데 작가가 심리 묘사를 너무 잘해서 실재하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전에 없이 소설을 많이 읽은 해였다. 내 소설 취향을 알아가고 있는 중인데, 아직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확실해진 건, 난 서사보다는 문장에 감응하는 문장성애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파악이 필요한 부분은 그래서 나는 어떤 문장에 꼴리느냐(?)인데.... 문장의 내용 면에서 보자면 인간과 삶에 대한 비범한 통찰이 묵직하게 들어있는, 그걸로 머리를 때리는 문장에 꼴린다. 어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동안 이런 문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어떤 소설은 한 페이지만 펼쳐도 그런 문장이 수두룩하게 박혀 있다(<평범한 인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특히 그랬다). 문장의 형식 면에서 보자면....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이 문장은 예술이야!"라는 말이 나오도록 문장을 꾸며내는 작가들이 있는 듯한데, 정확히 어떤 요소가 내게 이 작가들의 문장에서 꼴림을 느끼게 하는지 콕 집어내지는 못하겠다. 비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장은 물론이거니와 문단 단위로 봐도 도저히 뺄 게 없어서 문단을 통째로 옮기는 고생을 시키는 저자들이 있다. 이렇게 내 취향의 문장을 잔뜩 심어놓는 작가들의 책은 다 읽고 옮길 걸 생각하면 깜깜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무지 짜릿하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것. 배경묘사가 많은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 위에서 뽑은 아홉 권도 배경묘사가 적고 인물과 상황 묘사가 주인 소설이다. 나는 지루함을 쉽게 느끼고 자극을 추구하는 성향을 지녔다. 내 뇌를 들여다보면 자극의 역치가 평균보다 높고 도파민 수치는 바닥을 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정적인 취미라는 책에도 자극을 요구한다. 그리고 책은 자극적이다. 읽는 내내 쉴 새 없이 정보가 들어오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들어오는 정보가 내게 유의미한 정보여야지만 활자가 단순한 활자가 아닌 정보가 되고 자극이 된다는 사실인데, 유의미한 정보란 내 흥미를 끄는, 말하자면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정보를 의미한다. 소설의 배경은 내게 유의미한 정보가 아니다. 나는 인물 뒤의 풍경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 나뭇가지가 거세게 흔들리는지 아니면 살랑살랑 흔들리는지 제비꽃이 피었는지 아니면 양귀비가 피었는지 건축물의 구조가 어떠한지 집의 벽지는 또 어떤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 TMI다. 나는 인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한 옷과 악세서리의 디자인과 재질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 TMI다. 그러니 그런 거 하나하나 공들여 묘사해줄 시간에 대사나 한 줄 더 써주면 좋겠다.... 그러나 이건 나의 취향일 뿐이고, 섬세한 배경묘사를 음미하는 게 소설 읽기의 묘미라고 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걸 안다(그런데 "소설 배경묘사"로 여기저기 검색해본 바에 의하면 의외로 나같은 배경묘사극혐불감증 독자들도 많다!). 나도 아름다운 배경묘사에 감응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만 그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벚꽃을 봐도 감흥이 없어서 벚꽃 구경을 싫어하는 사람인 걸 보면 아마 앞으로도 소설의 배경 묘사를 즐기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은오의 소설 취향 분석이었습니다. 데이터 수집과 취향 분석은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앞으로 은오가 배경묘사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는 작가의 소설을 읽겠다고 하면 "싫어할걸?" 하면서 말려주세요.




비소설 부문





(제 약혼자분이 신형철 마니아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셔서 잠시 그녀의 귀를 막고....)


















올해의 문장상: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문장성애자는 신형철의 글을 좋아합니다.


















올해의 불쌍해상: 마리 루티,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제목이랑 표지가 알맹이를 학대함 ㅠㅠ


















올해의 대깨상: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대가리가 깨졌습니다.


















올해의 재미상(비소설 부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재밌다고들 하는데 진짜 재밌음.


















올해의 언니상(비소설 부문):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사나운 애착>


둘 다 좋으니까 둘 다 넣을래.


















올해의 부활기원상: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다시 부활해서 책 써!


















올해의 빛과소금상: 토머스 리고티, <인간종에 대한 음모>


쇼펜하우어에밀시오랑데이비드베너타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늘어지던 염세주의자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준 책.



















올해의 페미니즘도서상: 레이첼 모랜, <페이드 포>


페미니즘 책 중에서 딱 한 권을 꼽자면.


















올해의 비소설상: 알랭 드 보통, <불안>


비소설 중에서 딱 한 권을 꼽자면.



















올해의 반성상: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반성하며 어린이를 올바른 마음으로 대하기.


















올해의 분석상: 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


<공정하다는 착각>보다도 이 책을.






1년에 50권도 겨우 읽던 나는 올해 대략 120권의 책을 읽었다. 50권이라는 수치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치라는 건 알지만 나는 내가 일 년에 120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올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건 100퍼센트 알라딘 언니들의 공이다. 역시 어울려 노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음. 언니들이랑 놀려면 책을 읽어야 하니까 열심히 읽었고, 언니들이 읽는 책을 보면 재미있어 보이니까 따라 읽었고, 언니들이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가져 주니까 신나서 더 읽었다. 알라딘 서재가 내 독서 인생의 2막을 열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니들은 제가 언니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결혼신청으로도 뽀뽀로도 미처 다 표현되지 않는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원통하다! 맨날 결혼신청 해도 결혼도 안 해주고, 맨날 뽀뽀해도 돌아오는 뽀뽀는 거의 없지만-매정한 사람들....-그래도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아, 그렇다고 언니들만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극여초 알라딘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주시는 다정한 소수자 남성분들도 좋아합니다.


다들 올해도 저랑 같이 놀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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