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컨대, 이 책을 중학교 시절 구입했었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죽음'이라는 기즈키의 사건이 가져오는 주인공 와타나베 삶의 전면적 변화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 지금에서까지
틈날 때마다 매년 봄이면 다시 이 책을 접하곤 한다. 지금도 소설 표제지에 '매년 봄마다 이 책을 다시 읽곤 한다. 상실은 과연 치유될
것인가'라고 쓰인 내 손글씨가 보이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언제나처럼 씁쓸하다. 그 당시 나는, '밝은
세계'속에서 '어두운 세계'를 갈망하는 그런 유아기적 소망만을 안고 있었으니까. 지금에서야 내게서 멀어진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노라면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의 '상실'이라는 작용으로 인해 내게 미쳤던 수많은 사건과 일들을 깨닫고 가슴 아파한다.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좀 더 다정하지 못했을까, 하며.
그땐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 책의 메시지가 지금와서 오롯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그래서이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먼지나는 내 서가에서 이 책을 다시금 찾았다. 누렇고 때가 끼인 책 속에 찢어진 부분과 무언가 오염된
부분이 눈에 띄었지만, 그래서였을까. 내 성장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기뻤다. 당시는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이런 어른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소설같은 굉장한 체험을 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런 일들은 오히려 겪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때론 굉장한 체험으로 자신을 성숙시키기도 하지만, 내 경우엔 퇴행하고 말았다.
책을 읽다보면 나는 와타나베가 되기도 하고, 나오코가 되기도 하고,
미도리가 되기도 하고, 나가사와까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내가 이들과 다른 종류의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역시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사람을 경험하고 또 그 사람이 내 일부가 되기도
한다.
제목을 '노르웨이 숲'에서 '상실의 시대'로 바꿨던 건,
문학사상사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난 여전히 하루키의 이 책을 하루키마니아로서 좋아하지마는 않는다. 하루키의 뛰어난 점이 이 책의
통속성으로 인해 묻혀지고 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다시 읽은 이 책의 번역상 문제도 왕왕 발견되고, 띄어쓰기 문제도 잘못된 점이 보였다.(내가
갖고 있는 건 99년 판본) 작년쯤 영화화된 이 책의 영화 버전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못내 아쉽고 또 그랬다. 내 상상 속의 모든 게 부숴진
듯한.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 상상속의 무기력했던 나오코가 좀 더 적극적인 여성으로 나와서 좋았다. 나는 누군가의 부재라는 거대한
우물 속에 빠져 있는 그녀가 못내 마음에 걸렸고,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마지막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전화건 것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그도 20대의 청춘을 종언하고 미도리라는 생기 넘치는 여성의 '삶'과 조우하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 열망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희망적으로
생각한다.
뭔가 자꾸만 잃어가고 있고 조금씩 초조해져만 간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사람들 간의 관계가 엉킬 때마다 괴롭지만, 잃는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다. 받아들이고, 생은 계속된다는 명제를
입안에서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