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vulnerable, 아닐까?
상처입기 쉬운, 취약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소설에서 도쿄의 초현대식 거대 빌딩을 폭파하자는 논의를 통해 등장한다. 초현대식 빌딩에는 바로 이 vulnerable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지점을 건드리게 되면 바벨탑처럼 초현대식 빌딩은 무너지게 된다는 것. 사람도, 사회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가장 vulnerable한 노인들의 분투를 통해 이 사회에 대한 애정을 전달한다. 물론 지극히 현학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그 현학이 밉거나 혐오스럽지 않고 오히려 존경스럽다. 오랫동안 잊었던 질문들이 떠오른다. 소설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얼하는 인간이기에 하루 종일 끄적거리고 생각하기만 하는가? 소설가는 언제까지 소설가인가?
vulnerable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또 하나의 소설이 있다. 그건 바로 위대한 개츠비. 어렴풋한 기억에 의하면 개츠비의 첫문장, 혹은 첫페이지에는 이 단어가 등장한다. 개츠비는 그야말로 vulnerable의 전형이었다. 그걸 쓴 작가 또한 그렇고.
피츠제럴드와 오에 겐자부로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 단어에 대한 입장에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은 혼란스러운 청년처럼 살다 죽었고, 또 한 사람은 끈기있는 노인이 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