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번 파리에 가본 적 있다. 신혼여행이었다. 한쪽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를 타고 이틀에 걸쳐 도착한 2월 중순의 파리. 영화 '미드나잇 파리'에서 보았던 파리는 거기 없었다.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계절, 머무르는 내내 하늘은 우중충했고 질척한 비가 내리다 말다 했다. 지저분한 거리에는 눅눅한 악취와 앙상한 가로수뿐, 대테러 경보에 텅 빈 관광지들은 문 닫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에펠탑 반대편에 내어준 호텔방 창문으로는 공사장만 보였다.
그나마 기대하며 찾은 에펠탑은 죽은 듯 가라앉은 도시 한가운데 놓인 철골 구조물에 불과했다. 에펠탑이 생겼을 때 '추악한 철 덩어리'가 세워졌다며 시민들의 철거 요구가 빗발쳤다던데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도 커피를 주문할 때도 구멍가게에서 껌을 살 때조차 파리지앵들은 불친절했다. 2월의 파리는 그랬다. 나는 그곳에서 이방인의 기분을 사무치게 실감했다.
하지만 여행에도 취향이란 게 있는 걸까. 나는 신혼여행지 중에서 파리가 가장 좋았다. 그곳에서는 오직 남편과 나 둘 뿐이었다. 우리는 콧물을 훌쩍이며 로댕의 정원을 거닐고 오랑주리 미술관에 덩그러니 앉아 사방에 핀 모네의 수련을 바라보았다. 동양인이라곤 우리 둘 뿐인 거리를 찬바람을 맞으며 종일 쏘다녔다. 훌쩍 시간을 달려 몇백 년 전 파리를 걷고 있는 느낌이랄까. 쓸쓸하고 자연스러운 거리와 골목이 좋았다. 이방인에게 무심한, 아니 무뚝뚝할 정도로 간섭 없는 파리지앵들이 좋았다. 지저분하고 오래된, 내숭 없는 민낯의 풍경을 간직한 이 도시가 좋았다.
<열다섯 번의 낮>을 읽으며 나는 그때의 파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카페드플로르’를 읽었을 땐 작가와 함께 거리를 거닐고 카페에 머문 적 있었던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파리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소설가 신유진이 쓴 산문집. 여기에 낭만적인 파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우중충한 3월의 파리, 오래도록 이 도시를 겉돌았던 이방인의 파리가 있다.
우리 모두 어쩔 수 없다. 혹시 모를 낭만을 기대하게 된다. 지금은 이렇게 춥고 속이 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조차 아름다웠노라고 우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파리가 그렇다. 개똥과 오줌 냄새 진동하는 거리에 서서 콧물 흘리던 기억은 어느새 사라지고, 떠나고 나면 반짝이던 풍경만 남는다. - '카페드플로르'
고유명사 같은 '낭만의 도시 파리'처럼. 떠올리면 반짝이는 아름다운 날들도 그렇다. 알고보면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나날일지 모른다.
대체로 사람들은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들을 바라본다. 그 이면의 것들. 이를테면 하찮은 것, 가려진 것, 서글픈 것, 초라한 것, 사라지는 것들에는 굳이 시선을 두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런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신유진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것들을 쓰고 싶다. 그 애가 모두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을 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발바닥 밑에 붙은 하찮은 것들, 광원의 반대편에 선 것들, 로자를 품은 그 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 '로자에 대한 짧은 기억'
나는 여전히 서러운 어떤 것을 쓰고 싶지 않으나 사라진 보라색 스웨터가 자꾸만 눈에 밟혀 글자가 되어가고 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 '폭염'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 같은 열다섯 개의 이야기는 말한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했던 것들은 사실 그런 것들이라고. 사소하고 하찮아서 눈에 잘 띄지 않고, 어디론가 새어나가고 빠져나가 어렴풋이 떠오르곤 하는, 그러나 애써 떠올리고는 싶지 않은 그런 기억들이라
함부로 다루었던 가족사진이나 누군가의 그림자, 혹은 늙은 배우, 사라져버린 건물 관리인, 낡은 스웨터, 버려진 냉장고, 죽은 도마뱀, 누군가의 장례식 같은 것들.
그냥 지나칠 법한 평범한 일상과 사물, 알아채지 못했던 얼굴들이 작가의 펜을 거쳐 아름다운 글이 되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지만',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것들을 쓰고 싶다'는 이 작가의 책을, 나는 솔직히 어딘가에 숨겨두고 아무도 읽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때의 파리를 나만 알고 있는 것처럼, 나만 알고 싶은 책이었다. 그 정도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