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마다 중점을 두고 연마하는 관점이 상이하기 때문에 평론집을 읽는 일은 그 평론가의 렌즈를 잠깐 빌려 그의 시선에서 이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국문학 연구자로서, 문학평론가로서 이지은의 가장 탁월한 점은 '삶'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관심이다.
물론 '삶'에 관심을 두지 않는 연구자나 평론가는 (있을 수) 없으므로 추가적인 설명을 보태자면, 이지은은 담론의 틀로 가공되거나 통계로 환원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삶에 주목한다. 결코 정합적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고, 그 스스로도 갈피를 알기 어려워 모순으로 들끓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머리말은 이지은의 평론과 논문이 어디에 뿌리 닿아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유효한 단서가 되어준다.
머리말에서 이지은은 그간 '위안부' 연구를 통해 문학과 삶의 진실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음을 밝힌다.(이지은의 박사학위논문은 <일본군 '위안부' 서사 연구>(2023)이며 그는 '위안부' 관련 다수의 논문을 썼다.)
주지하다시피 문옥주는 어렵게 귀국 허가를 받아내고서도 귀국선을 타기 전날 아버지가 만류하는 꿈을 꾸고 귀국을 포기, 위안소로 돌아간 인물이다. 이후 사이공에서의 시간을 아름답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한 문옥주의 이야기는 역사부정론자들에 의해 합리화의 근거가 되곤 했다.
이지은은 이처럼 문옥주의 이야기가 위안소 변호에 소모되는 것에 대해 (지식이나 정치적 의도에의 복속 차원을 떠나),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7)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는 오히려 비극적인 모순의 증거로 읽혀야 하며, 피해자성 박탈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됨을 역설한다.
삶에 대한 이해, 그리고 비극적인 '모순'. 이지은의 섬세하고도 예리한 시각은 항상 이 지점을 겨냥하며 위로든 아래로든 납작한 환원을 거부한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도 중요한 문제의식은 "역사적 실체를 담론으로 대체하는 논법"(16)에 대한 경계였다. 그리고 이는 <소셜 클럽>을 읽는 데도 핵심 키워드가 된다.
또한 이지은은 현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경계, 새로운 틀의 구축 과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를 청하는데, 규율화를 통해 정상성과 합법성이 부여되고 이는 가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ex. 전시 강간이 성매매처럼 계약 관계로 호도되는 것)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 위에서 이지은은 메스를 갖다대기 이전에 우리 각자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 모순덩어리인지를 먼저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장르가 왜 통계나 여타 기록물보다 '삶의 진실'에 더 맞닿아 있는 장르인지를 차분히 증거한다. 환원보다 확장에 관심을 둔 이지은의 글을 읽으면 미래를 꿈꾸는 방향이 다각도로 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소설을 읽는 일 또한 소설의 꿈을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미래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개입'하는 일이다."(110))
8년 간 쓴 글을 묶은 이 평론집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듯이 소설에서 포착되는 삶의 모순을 통해 사회적인 차원에의 확장(소셜)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는 서로에게 관객이 되어주기를 청하는 대목에서도 일부 암시된다. 각자의 고유한 서사는 또 다른 고유한 개인들과의 연결 속에서, 서로를 승인하고 들여다보는 작은 실천들을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영화 <파묘>에 빗대어 한국문학장의 '파묘'를 다룬 흥미로운 미발표작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첫 순서로 읽고 다시 처음부터 읽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이지은이 지난 8년 간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느낀, 동시대 문학장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문장 - 십 년을 단위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십진법으로 굴러갈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