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로 놓인 「철거」는 철거가 예정된 오래된 빌라에서 이전 거주자의 메모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래된 빌라에서 오래된 사체 한 구와
남은 문장들이 발견되는 아침에 관한 이야기
해는 또 떠서 오늘이고
문장들은 사라지는 중이고
방은 죽음 이후만을 보여주고 있다
연필 대신 베개를 품에 꽉 안고 있는 손가락뼈들
외롭지 않은 날에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발견된 사체가 메모의 작성인인 것으로 암시되는데, ‘오래’되었다는 수식에 더해 불연속적인 메모의 내용들은 그가 고독사를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결국 연필을 내려놓고 베개를 끌어안고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 그의 생애가, 그가 무수히 남겨놓았던 희망의 다짐들과 대조를 이루며 깊은 절망감을 자아낸다.
누군가 다가와 혼자 사냐고 묻는 의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질문을 "보살피는 체온"(9)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을 심정이 이 문장 앞에 오래 서 있도록 했다.
맨 마지막 문장의 독특함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싶다.
왜 ‘외로운 날에/썼다’거나 ‘외롭지 않은 날에는/안 썼다’고 하지 않고 ‘가능/불가능’의 ‘짐작’으로 이 문장을 구성했을까.
이 문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데, (1) 우선은 화자가 이전 거주자의 ‘쓴 것’을 긍정적인 성취로 인식하는 듯한 암시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있어 쓰기를 가능케 한 조건은 ‘외로움’이었으므로, 그의 쓰기를 일반론에서의 ‘성취’와 마냥 등치할 수 없는 곤경이 독자에게 주어진다.
어쩌면 이는 이 시집의 화자들이 ‘하기’라는 수행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2) <겨를의 미들> 속 화자들에게 뭔가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었다 죽을 나무만을 골라 심었다
그 바람이 스치자 밤마다 부러졌다
해놓고 변명을 하기보다는 변명을 위해서라도 해야지
변명을 만들어놓으면 하게 되겠지 나는 너무 하지 않으니까
저문다
해도 안 해도 있어도 없어도 그 자리에서 턴테이블은 회전한다
기록된 음악이 재생되며 시제時制를 지운다
― 「변명의 자리의 변명의」 부분
“죽을 나무만을 골라 심”(58)는 기이한 행동은 “변명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변명의 내용이 ‘어차피 죽을 나무였다’일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 이 시의 내적 논리에 의하면 평소에 “너무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하기’라는 행위로 견인하기 위해 변명이 동원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하기(심기)’는 변명할 일을 만들지 않을 실천이 되지 못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변명 자체의 목적이 된다.
즉, 이 화자는 변명을 하기 위해 변명의 내용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다. 마치 나무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듯이. 그래서 섣부른 낙관에 기대기보다는 나무의 죽음 이후에 너무 슬퍼하지 않을 안전장치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그렇다면 나무의 죽음은 ‘있을 것’이자 화자의 믿음의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있을 것’에 대한 믿음은 이미 ‘있는 것(일어난 것)’을 재배치하면서 화자들이 이동하도록(걷도록) 추동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 시세계는 ‘있는 것/없는 것’(존재론)과 ‘보는 것/못 보는 것’(인식론), ‘있는(던) 것/있을 것’(실현/미지칭 예정형)이라는 너무나도 상이한 층위의 논리들을 마구 뒤섞는데, 믿음 및 그로 인해 추동되는 행위가 그러한 이분법을 초과하는 제3의 항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때, 거의 모든 시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걷는 화자’들은 비록 인식은 불가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리라 믿어지는 것에 도달하고자 기꺼이 이동을 계속한다. 즉, “있을 무엇 때문에 있는 무엇이 움직이려고 해본다.”(「겨를의 미들」, 「낮의 증거」, 「극성」)
믿음의 내용을 미리 만들어두고서 그 내용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로 움직이는 모습은 언뜻 운을 시험해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가보면 펼쳐질 것이 있다는 것을 아직 믿습니까”(「극성」, 강조는 인용자)라는 질문이 암시하고 있듯, 존재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의 “장거리 경주”(「철거」)는 “아직도 멀”기만 한 채 필사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끝까지 따라가보”(「극성」)는 최선의 ‘하기’이다.
그렇기에 믿음이라는 말은 불충분할지도 모른다. “너 백 살 때까지 내가 생일 축하해줄게”(「난―성동혁에게」)라는 약속에서 드러나듯, 의지에 가까운 믿음인 것이다. (해당 시의 첫 연에서) 무성히 죽음이 번지는 가운데에서도 기꺼이 ‘백 살’을 기약하는 그러한 의지가 이들의 믿음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시를 한 편 소개하고 싶다. 아래 시에서는 느닷없는 꿈으로 인해 한 것과 안 한 것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마구 뒤섞인다. 정신을 치고받는다는 말도, 그 동기가 서로를 삭제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깊은 파문을 남긴다. “나는 나를 나와 빠르게 나눌 수 없는 사람”(「되레」)이라는 언급이 암시하고 있듯, 결국 화자의 분리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만 같다.
결혼을 한 적 없는데 희미한 기억으로는 분명히 그러한데 이혼하는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에는 오늘의 아침인지 미래의 아침인지 결혼을 한 적이 있었는지 헤어진 것들의 해진 자락을 붙잡고 있는 나만 모르는 것들이 마지막인 듯 필사적으로 끝자락 어디쯤 붙잡고 에워싼다
아는 얼굴들이 성별을 지우면서 섞이고 아는 남자와 남모르게 알던 남자가 다투듯이 오로지 한 남자가 되기 위하여 서로를 삭제하려고 정신을 치고받으며 이 여자 앞에 혼자 서려는 것이다
(…)
이혼하는 아침에는
같이 일어나지 않거나
같이 밥을 먹지 않거나
같이 섞었던 것들을 하나씩 따로 공들여 떼어내면서
낳았던 것들도 주워 담으면서
엄마,아빠,처럼 들렸던 목소리들도 훈육하듯이 냉정하게 멀리하면서
한 적 없는 사정과 거듭하는 배란과 결혼과 동침과 이혼과 계속해서 돌고 도는 나만 모르는 것들이 설레는 것들도 차단한다
― 「이혼하는 아침에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