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CRITSSAY’라는 단어가 표지에서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파란 아케이드 시리즈의 다른 평론집들은 표지에 ‘CRITICISM’이라 적혀 있기 때문이다. 크릿세이란 ‘읽기(크리틱)’와 ‘쓰기(에세이)’의 결합이자 “읽기의 수행성으로 열린 쓰기”(9)라 할 수 있다.
크릿‘세이’인 만큼 수록된 글들이 길지 않으며 무엇보다 정말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문학 작품에 더불어 여러 시사적 이슈, 방송 프로그램, 정책 현안, 정치인들의 행태 등이 함께 비평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점 또한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전 저서들인 <독자 시점>이나 <건너는 걸음>에서 저자는 현상의 기저에 은폐되어 있는 기성 권위의 욕망과 폭력의 문제를 지적하고 무비판적으로 통용되는 관습의 당위성을 되물으며 비판적 각성을 촉구하곤 했는데, 이번 책에서는 그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논점을 흐림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저자의 강점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독서의 즐거움을 더한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을 6개의 키워드로 추려내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여가며 몇 자 리뷰를 적어보고자 한다.
1. 신성화의 기만
초반부에는 동물을 인간 중심의 의미화로 사고 체계에 포섭해온 관습이 지적되는데, 이것이 가능해진 한 원인이 전능자의 창안에 있다는 해석은 흥미롭다. 어쩌면 이는 ‘신성화’의 발명이라 해도 무관할 텐데, 그로 인해 “인간도 신성시”(28)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동물 착취의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유사한 문제의식이 김숨 소설 분석에서도 발견된다. 남편은 이혼하자는 아내에게 ‘구원’의 당위성을 들먹이지만, 이러한 ‘신성화’는 실은 일방적 헌신과 의무를 요구하는 격하에 가까우므로 기만이라 할 수 있다. 실은 ‘구원’이 가능한 자로 아내를 격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물론 격상도 대상화이고 폭력이다) 그 구원을 받아 마땅한 자기 자신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남편이 거론하는 그 당위성의 역방향은 결코 성립하지 않으며 아내의 경우에는 ‘구원’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은 위계의 문제이므로.
2. 불운 ≠ 불행
뒤이어 불운과 불행을 엄밀히 구분하며 소외계층이 왜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정연하게 짚어낸다. 불평등에 관한 논의가 거론되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 없어서가 아니라 “불평등의 실질적인 영향을 받는 사회 구성원의 삶이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53)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일 수밖에 없음을 함께 지적한다.
불행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이 어떻게 폭력성을 은폐하며 개인을 보호의 울타리 밖으로 내모는지가 치밀하게 사유되고 있는데, 특히 어느 한 개인에게 내재된 ‘약점’이 절대 불행의 귀속 사유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80)
“우리 사회의 불행을 개인들 내부에 유폐하지 않고 외부 구조의 폭력을 환기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안보윤의 소설은 중요하게 거론된다. 죄책감이 윤리적 덕목으로서 어떻게 요청되는지를 함께 짚어낸다.
3. '중립'의 기만
다소 길지만 중요한 대목이라 옮겨보기로 한다.
“이 무거운 마음은, (사회 구성원의) 무지와 무심에 대한 하나의 태도이자, 그 자체로 불식간에 무지와 무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역할까지 하고 만다. 섣불리 다수의 책임을 규탄하는 계몽적인 태도나 다수를 무조건 가해자로 돌리는 손쉬운 태도 양쪽을 경계하면서도, 겉으로 중립을 가장한 무지와 무심이 실은 사회적 폭력의 일부 혹은 그 원인임을 깨닫고 기억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56)
(입장 정립을 위해 다각도의 검토를 거치며 고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중립’은 아무 입장도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또 다른 의사표현이라는 점에서 허울 좋은 명목에 불과하다. 이렇듯 ‘무지’할뿐더러 ‘무심’하기까지 한 중립은 실은 ‘동조’로 기능할 때가 훨씬 많고, 그렇기에 사회적 폭력의 재생산에 일조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한편 3부의 제목은 ‘무지한 무시의 말’이다. 무시에서 무지가 비롯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무지하니까 무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 ‘무지한 무시의 말’이 이중적인 비하의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124쪽에서 실제 사례를 들어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4. 태만함의 대타항으로서 문학
우선 저자가 ‘문학적인 것’과 ‘문학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보자.
① “찬양이든 비판이든 오직 한 가지 의도로, 그 의도만을 선포할 목적으로 쓰인 글을 ‘시’라고 부를 수는 없다.”(115)
② “무엇에든 매몰된 인식으로는 말의 위의를 살릴 길이 없고, 말의 위의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문학적인 것이다.”(117)
③ “반성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비웃음을 당해도 창피함조차 없는 듯 보인다. 태만함에 대한 죄책감도 조롱에 대한 수치심도 없는 그런 비문학적인 사람들이 아무 데서나 활개 치며”(117)
이러한 서술을 통해 편협함이 문학적인 것의 정반대에 놓여 있음이 분명히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 편협함은 다른 방식의 사유는 전혀 하지 않겠다는 오만함과 태만함에 근거해있다. 태만하기에 오만하기까지 한, 혹은 오만해서 태만한 태도는 절대 문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문학’의 반대말은 ‘태만함’이다. 이때 태만은 자기반성이나 쇄신이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으면서 상투화된 권위의식에 영합해버린 낡아빠진 감각을 통칭한다.
사유가 한 가지 방향으로 제한된 것만이 문제인가. 그렇게 고착된 사유 체계가 특정 계층의 사리사욕을 공고히 하는 데 복무하는 경우가 더 문제다. 문학은 그러한 욕망을 은폐하기 위해 계속하여 신성성과 권위를 부여받으며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의도 아래 호명되고 또 호명된다.
③에서는 문학적인 것이 반성, 부끄러움, 죄책감 등과 연결되는 감각임을 역으로 도출해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더 잘 부끄러워하며 더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옳지 않은 일에는 정당하게 분노를 표하며 살아야 한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삶을 살아갈 때의 신념과도 결코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
5. 웃음의 혐오학
약자 조롱이 기본값이 되는 한국식 개그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이 ‘공모로서의 웃음’(공범 의식)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웃음을 주고받은 축이 합의한 관념 쪽에서 배제한 누군가가 있”고, 그때 “웃지 않은 누군가가 모욕감을 느꼈다면, 그 배제는 혐오와 차별에 가까운 것”(136)이다. 이처럼 개그가 혐오와 차별을 재생산하는 기제로 기능한다면 그건 웃음이라는 ‘동의’를 통해 특정 관념에 면죄부를 덧씌워주기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어떤 개그가 내면화하고 있는 사회적 관념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파악하면서 경솔하게 동의해버리지 않는 태도가 요청된다. “웃음이 조성되는 경우 웃음보다 동의가 먼저 문제되어야 한다”(136)는 지적은 그래서 타당하다.
또 우리는 정당한 분노나 요청의 표현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경우를 자주 맞닥뜨리곤 한다. 공모하는 웃음(=혐오)이란 모든 것을 얼마나 쉽게 일축해버리는지. 특히나 어떤 문제를 지적하면 그 문제가 아니라 지적한 사람이 특별히 예민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이지 않은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정당한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갖은 모욕과 수모를 기꺼이 감수한 일이 있는 분들에게 특히 큰 위로가 될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평의 최종 지향은 결국 삶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다는 믿음이 있는데, 그래서 내가 이 분의 비평을 특히 좋아해왔구나 새삼 깨닫기도 했다. 그리고 결코 ‘수혜자’로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저자처럼 질문해보자. 이게 웃긴가? 왜 웃지? 웃으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웃어버림으로써, 웃도록 유도함으로써 도대체 어떠한 배경과 맥락을 짓뭉개고 있는지(142) 수시로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는 혐오의 습관은 진의를 고민하려 하지 않는 태만한 감각 구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6. ‘비평가’로 살기
저자는 비평 행위와 비평가를 구분한다. 비평 행위는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이미 일상생활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지만, 비평가로 살기 위해서는 “비평가로서 살고 있다는 자의식”(250)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평 대상에 대한 ①관심, ②감상, ③공부가 지속적으로 요구되고, 이렇게 촉발된 감각과 사유를 반드시 글로(글이 어렵다면 다른 무엇으로든)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산출)
비평가는 ‘두 단계의 삶’을 살게 된다는 서술이 그래서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쓰는 행위를 통해 다시 경험하고, 더 잘 경험하게 되는 것이 비평가인 것이다. 과연 읽고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창조”된다.(251) 머리말에서 읽기(크릿)가 ‘경험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었다면, 쓰기(세이)는 쓰기 행위가 끝난 뒤에 효과로서 당도할 주체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백지은의 평론을 읽을 때마다 통쾌함과 개운함을 느끼곤 한다. 간혹 어딘지 미심쩍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어떤 현상을 지탱하고 있는 문제적인 내부 구조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그의 글을 읽으면 그 원인을 분명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로를 받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에 지지받는 경험은 참으로 값진 것이다. 나 또한 어떤 지지를 건네는 독서를 이어가야 할 것이고.
그런 한편 더 ‘제대로’ 살고 싶어진다. 부끄러움이 없게 살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그건 불가능할뿐더러 기만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더 잘 느끼고, 그걸 행동으로 분명히 책임져가면서 지금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무책임하게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글에는 정말로 그러한 힘이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 부끄러움과 분노는,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문학에 관한 어떤 지독한 편견을 해체하는 데 들인 정당한 값이어야만”(78)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 모두가, 당연하다고 승인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되물으며 각자의 삶에서 크릿세이를 실천해나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