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아 문학장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문학의 유통과 소비 양상에서부터 문단 제도 변화 등에 관한 논의는 근 10년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코로나가 급박하게 앞당긴 ‘비대면 시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속화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점은 ‘포스트휴먼 시대’와 ‘시(詩)’의 관계성을 (1)‘위기’로 섣불리 재단하거나 (2)지나친 낙관주의적 전망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점으로 접근할 때 간과할 수밖에 없는 맹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는 데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아 먼저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사유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고전적인 논의들이 포스트휴먼‧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에게 닥친 ‘위협’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예각화되어 있었다면, 이 책은 '인간성'이 도대체 어떻게 조건 지어졌는지를 되물으며 그간 '주체'가 전유해온 권력과 위계의 문제를 폭로하고자 한다. 쉬운 예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두려움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러한 가정에는 인간의 우월성과 견고한 자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한 기저에 은폐되어 있는 인간중심주의‧우월주의를 탈피하는 것에서부터 포스트휴먼 담론이 사유되어야 함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즉, ‘위협’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가 아니라 자동화된 사유 체계 내에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보자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인공지능의 기술력이 아니라 인간의 폭주와 무절제”이다.(이경수))
‘소통’과 ‘감정 이해’가 오히려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진단은 성급한 해결 의지에 맞설 대안으로 제시된다. 인공지능과 인간 및 다른 종들이 어떻게 적절한 관계성을 맺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오히려 오늘날 시가 더욱 요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제시한 이경수의 1부를 시작으로,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인간중심주의 및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과 반성적 시각들이 이어진다. 특히 '비주체'에 대한 폭넓은 사유들이 책의 상당한 분량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1) 인간/비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과 물질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위험한 일들은 인간과 물질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설정하는 데서 발생한다”(77)는 공현진의 타당한 지적은 그간 인간의 우월성이 무비판적으로 전제되어온 점을 겨냥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사유할 때 보통 그려지는 관계도는 은연중에 권력 위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물질에게선 힘을 제거”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2) ‘비인간의 해방’을 근거로 들어 포스트휴머니즘을 마냥 낙관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 책은 적절한 사유의 장을 마련해준다. 아래 성현아의 지적은 ‘인간/비인간’으로 손쉽게 환치해버리는 관습적인 구획이 그 내부에서 ‘인간’ 자격과 특권을 획득하지 못한 존재들에게 어떻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가 도래하며 인간/비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비인간에게 해방을 선사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에 이미 포함되어 있던 비인간 존재들을 않고 다음 담론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한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비인간의 구분을 기계를 가진 인간의 계기가 없는 인간의 대결로 답습하는 차원에 그칠 수 있다.”(153)
가령 ‘인공지능의 대체로 인한 인간소외’라는 화두를 제시할 때, 그 ‘인간’ 범주 내부에서 명백히 발생하고 있는 복잡다기한 ‘소외’ 문제는 너무나 쉽게 간과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A는 인간P와 동등한 자격과 특권을 지닌 인간인가?) 즉 인간중심주의, 인간 우월주의를 탈피해야 하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 내부에서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게 하는 젠더, 퀴어, 장애, 소득, 지역, 학력 등의 역학과 상관관계를 세밀히 살펴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예기치 못한 위협처럼 섣불리 미래를 재단하는 것은 어쩌면 책임을 어딘가로 떠넘기려는 태만과 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대표 저자의 언급대로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축적물일 수밖에 없기에, ‘지금-여기’를 올바르게 사유하고 적절한 토대를 구축해나가는 것만이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전망을 더욱 긍정적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미래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시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마치 예형된 피구라처럼―이미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알 수밖에 없는 ‘시’일 것이다. 미래의 시는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