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우연히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알게 된 직장동료 k와 함께 지하철역을 나설 때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라는 영화 봤어요?'하고 k는 내게 물었다. 그 생경하고도 존재감 있는 제목 때문에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하고 반문했다. 그때 k는 내게 영화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러브레터>를 만든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밖에. k는 그후 직장의 부조리한 상황에 발목이 잡혀 타의로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 그 일련의 상황들이 진행되던 어느날 k와 나는 사무실 옥상에 올라가 얘기를 했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네가 회사를 관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말에도 힘이 있었던 걸까. 그 순간의 말 그대로 k는 표면적으로는 자발적 사직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말을 감수해야 했고 그에게 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k는 등떠밀려 회사를 관뒀다.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는 내게 k와 함께 묶여 기억에 저장되었다.
며칠 전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저절로 k가 떠올랐다. 그사이에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를 본 나는 어리석게도 마시멜로 같은 말캉하고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의 화면을 기대했다. 맥주라도 한잔 마시며 소파에 널브러져 관절에 들어간 힘을 빼고 보는 영화를 기대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이면 그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 뺨을 발그레 붉히고 이입된 감정에 못내 행복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시공간을 알 수 없는 낯설고 거친 장면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옛날 옛날에... 그 도시는 이민 온 사람들로 넘쳐흘러 마치 그 옛날에 있었던 골드 러시와 같았다. 엔을 목적으로 엔을 파내려고 모여드는 도시, 그 도시는 이민 온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 "엔타운",이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 영화는, 세기말적인 어두운 그림자가 뒤덮인 암울한 도시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세상은 아름다워, 인생은 살아볼 만해!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세요.'하고 외치던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를 만든 그 감독이란 말야? 마치 함박눈이 내리는 것처럼 환상적인 4월의 벚꽃의 오프닝을 만나리라 기대했던 예상을 감독은 보란듯이 깨뜨렸다.
법보다 주먹의 힘을 믿는 도시 엔타운, 빛보다 어둠이 익숙한 엔타운, 그곳에 어린 소녀가 이제 막 엄마의 시신과 이별한다. 소녀는 이리저리 떠넘겨지다 창녀 그리코에게 맡겨지고 그리코는 소녀에게 나비라는 뜻인 '아게하'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인 나비를 본 아게하에게 그리코는 소녀의 가슴 언저리에 애벌레를 그려준다. 그렇게 그리코와 아게하의 엔타운 생활이 시작된다. 영화는 몹시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리코 패거리는 어느날 사고로 죽은 그리코의 손님을 암매장하려다 그의 뱃속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하고 그것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데 쓰인다는 것을 알아낸다. 마술처럼, 1000엔을 먹은 환전기는 열장의 1000엔을 뱉어냈다. 마치 꿈처럼.
그리코 패거리는 도시로 나와 엔타운드림이라 할 수 있는 라이브하우스를 차리고 밴드를 만든다. 그리코의 연인 페이홍은 그리코에게 창녀짓을 관두고 이제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라고 한다. 밴드가 꾸려지자 그리코는 밴드의 반주와 함께 노래를 한다. 마이웨이. 그들의 원죄의 근원이 되는 노래이자 엔타운들의 꿈의 결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 마이웨이. 그리코는 내지르는 목소리가 아닌 목 깊은 곳에서 감추고 움추리며 쥐어 짜내듯 마이웨이를 부른다. 마치 죄의식을 느끼는 듯한 이 장면은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부르게 만들면서도 뭔가 한구석에-그들의 꿈을 이루는 밑바닥에 범죄의 그림자가 깔려 있음을-꺼림칙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라이브하우스 엔타운은 궤도에 올라 그리코도 유명세를 떨치지만 정작 페이홍은 그리코의 앞날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레코드 회사의 스텝들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붙잡히게 된다. 그리코는 엔타운드림을 이룬 스타가 되지만 아게하는 상실의 날들을 보낸다. 그런 어느날 수순처럼 아게하는 그리코의 나비 문신을 시술했던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가슴에도 버터플라이 문신을 새긴다. 애벌레에서 탈피한 나비. 버터플라이 문신을 새기며 아게하는 어린 시절 창녀인 어머니가 손님을 받는 동안 화장실에 갇혀 있던 시간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내가 나비를 죽였을까요, 죽은 나비일까요. 변기 위에 서서 나비에게 손짓을 하며 엄마를 부르는 어린 아게하의 몽환적인 모습은 그녀의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녀가 애벌레에서 탈피하여 변태의 탈바꿈을 하는 극적인 순간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띤다.
가상의 시간과 공간에서 사는 엔타운들의 이야기인 영화는 암울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언어를 통해서도 나타내고 있다. 소통 부재인 바벨의 시대를 상징하려 했던 것일까, 국적불명의 영어와 북경어, 일어가 혼재되어 아게하의 입을 통해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옮겨지며 도달해야 할 곳을 못찾고 허공에 떠돌기도 한다.
엔타운의 한 소녀 아게하의 애벌레 그림에서 시작된 그들의 이야기는 거대한 폭발과 하늘에 흩날리는 엔화 지폐 속에서 끝을 맺는다. 엔타운은 정녕 존재했던 것일까, 앞으로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엔타운일까. 혼란스러운 세기말을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꿈은 어떤 의미일까. 나비와 노닐던 장자의 꿈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가슴에 새겨지는 낙인처럼 엔타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 그래서 더욱 엔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그들, 엔타운들.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와 함께 떠오르는 k의 기억은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엔화가 절대 가치인 엔타운, 그 엔화를 불에 던져버리는 엔타운들. 내게 두 부조리함은 그렇게 하나로 묶이게 되었다. 일련의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던 완성도 높은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지만 스틸 컷 하나로도 훈훈함을 느끼게 만든 이와이 슌지 감독과 연결시키기에 이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는 확연히 다른 선상에 있다. 초기작이라고 지레 짐작하기에는 그 완성도가 몹시 뛰어나 자료를 뒤적여보니 <러브레터> 이후의 작품이다. 감독은 어떤 생각으로 <러브레터>를 만들고 이어서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를 만들 수 있었을까. 감독에게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와이 슌지 감독, '당신은 이제 세상을 순정만화로밖에 못 보는군요!'라고 비꼬았던 걸 용서해요. 그리고 <스왈로테일버터플라이> 같은 놀라운 영화를 다시 한번 더 만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