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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able feast

빈센트 반 고흐는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삼촌이 공동대표로 있는 헤이그의 화방에 견습사원으로 취직한다.

 Goupil&Cie라는 이름의 화방은  파리, 브뤼셀, 런던, 뉴욕에 지점을 가지고 있던  국제적 규모의 화방으로 고미술품이나 바다 건너 일본 화가들의 그림과 미술 작품을 취급하기도 했지만   사진기술의  발달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똑같이 찍어 낸 복제품들을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   다량으로 팔아 수익성을 높이 올렸다.

 값비싼 실제 작품 보다 저렴한 복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다 보니 청년 고흐가 근무 했던 헤이그 본사의 화방은  날마다 수많은 고객들이 찾아 왔다.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화방 견습생으로 일했던 고흐는 친절함과도 거리가 멀었고 무엇보다도찾아오는 손님들이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삼촌은 조카 고흐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기 위해 런던과 파리 지점으로 보내지만 고흐는 그곳에서 오로지  화방에 입고 되는 작품에만 관심을 보였고 손님들에게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해고 당한다.

청년 고흐가 화방에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 시종일관 거만하고 불친절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는 가난한 이들을 벌레 처럼 보는 부유한 이들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아서 였다.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열심히 일한 만큼 부를 누렸던 헤이그와 달리 영국 런던은 거리 어디를 가도 구걸하는 이들로 넘쳐 났고 가난 때문에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이 매춘을 하고 그 돈을 부모들이 갈취 하는 처참한 사회적 현실에 10대 청년  고흐는  큰 충격을 받았다.

화방에서 쫓겨난 고흐는 런던에서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조 교사로 일을 했고  저녁 부터 밤 까지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가난한 이들의 삶을 더 가까이서 목격하게 된다.

목사 아버지의 강요에도 신학 공부에 대한 관심은 눈꼽 만큼도 없었던 고흐는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삶을 목격하고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 하기 시작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고흐는 뜻밖에도 전도사 양성 학교 입학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크게 좌절 하고 네덜란드 북부에 위치한 드렌테로 훌쩍 떠난다.

1883년 가족으로 부터 금전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된 고흐는  팔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방에서 일하던 시절에 고객들이 가장 선호 했던 그림은 수채 물감으로 채색된 작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고흐는 연필과 잉크로 밑 그림을 스케치 하고 나서 수채 물감으로 덧칠 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인상파전>에 참가하며 꾸준하게 작품을 출품해 왔던 에드가 드가는 일상생활, 말, 정물 등 온갖 소재를 유채, 크레용, 목탄, 수채, 파스텔, 판화, 조각등 다양한 기법을 이용한 작품으로 주목 받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명성이 높아 질 수록 그의 작품 가격도 함께 올라갔지만 태생적으로 약한 시력을 갖고 있던  드가는 <살롱>출품도 거절 하고  1889년 만국박람회 예술관의 전시도 거절한다.

국제적 명성이 드높은 화가의 은둔 생활에 조바심이 난 언론과 미술계는 드가가 두 세 작품을 그룹전에 내는 것 만으로도 신문에 대서 특필 되었을 정도 였다.

1881년 제6회 파리 인상주의 전시에서 드가의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가 등장 했을 때 평론가들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조각상을 향해 “원숭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장이 아닌)동물원이지 않은가.” 라며 드가를 향해 신랄한 악평을 쏟아 부었다. 

 쏟아지는 악평과 비난에 드가는 작업실 구석에 둔 옷장 문을 열고, 조각상을   깊숙히 밀어 넣고 두번 다시 세상에 조각상을 공개 하지 않았다.

오페라단의 하급 발레 무용수로  무대 뒤 소품 같은 취급을 받으며 보잘것 없고  빈약하고, 하찮다는 의미로   ‘작은 쥐’(Petites Rats) 무리라고 불렸던 소녀 마리는 드가가 세상을 떠난 뒤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가 되었다.

주변의 인상파 화가들이 찰나의 빛과 색을 그리는 데 몰두 하는 동안 ,  인간의 내면에 스며든  감정과 시대의 공기까지 담으려고 했던  마네는 <폴리 베르제르의 바> 작품이 세상에 공개 된지 1년 후 1883년 1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3개월 후 4월 30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900년 20세기 신 문물과 산업혁명의 세기를 뽐냈던 파리 만국 박람회에  공식 참가한 대한제국은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한국관을 지어 전통 공예품과 농기구 등을 선보이며 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세계에 알렸다.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조선 장인들의 나전칠기가 출품되자  서구 엘리트들은 동양의 신비로운 칠흑과 오색 자개 빛에 매료되었고, 이때부터 한국 나전칠기는 '글로벌 컬렉터들의 표적'이 되기 시작한다.

1905년 야수파가 등장한 이후  야수주의와 입체파로 나눠져서 서로 유사한 그림을 전시장에 쏟아내며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밀고 나가는 젊은 화가들 집단인 파리파 무리들과 어울렸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아프리카 가면의  단순하면서 간결한 선과, 캄보디아의 크메르 부처 석상에서는 부드러운 면(面)의 미학을  합쳐 길쭉한 얼굴, 한 줄로 떨어지는 코, 평면 위에 펼쳐진 인물.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던 모딜리아니만의 화풍을  완성시킨다.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한 1914년 유렵 전역에 몰아닥친 전쟁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파괴 했다.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그릴 수록 영원에 대한 갈구가 깊어졌고 삶의 덧없음이 뼛속까지 파고들어갔다.

가난, 폐병,  마약과 술, 여자에 탐닉했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던 1920년까지  현재 우리가 아는 작품들을 모두 쏟아 냈다.조선 제일의 명문가 문인 가문에서 태어난 강세황은 정치적 파벌 싸움으로 인해 가문에 불어 닥친 불운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야인으로 지냈다.

당시 조선 시대 양반 50대, 강세황은 회갑년을 넘긴 직후 61세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영조의 배려로 처음 관직(영릉 참봉)을 받게 된다.

그의 관운은 70세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해서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원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최고 명예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1782년 임인년 70세가 되던 해에 강세황은 붓을 들고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속 강세황은 머리에 관원들이 조정에 나갈 때 쓰는 공식 모자인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있으나, 몸에는 벼슬이 없는 선비들이 집에서 입는 옥빛 야복(도포)을 걸치고 있다.

 조정의 관모와 재야의 평상복을 동시에 착용한 차림새는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매우 독특하고 파격적인 연출 뿐만 아니라 70세 노인의 얼굴에 피어난 검버섯, 깊게 패인 주름살, 희끗희끗한 수염, 세월을 견딘 눈매를 미화 없이 극사실적으로 묘사 했다.

강세황은   조정에 나아가 관직을 수행하는 공직자로서의 삶(출, 出)과 자연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의 삶(처, 處)을 모두 겪은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담아 70대 노년에 이른 스스로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상단에 강세황이 직접 한문으로 써넣은 찬문(자기 비평)이 있어, 자신의 기이한 옷차림에 대한 설명과 스스로의 내면 인식을 후대인들에게 명확하게 알리고 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은 하얗고 머리에는 오사모를 썼으면서 몸에는 야복을 걸쳤구나. 심신을 조정에 보냈으나 이름은 일찍이 산림에 숨겼도다. 가슴에는 수천 권의 책을 간직했고, 손에는 성인을 뒤흔드는 필력이 있구나. 어찌 사람들이 알겠는가, 나 혼자 즐기노라. 노인의 나이는 일흔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라.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쓰네. 때는 임인년(1782)이다."

조선 시대 남성 평균 사망 나이는 백성들은 39세, 조선 제 1일의 의식주와 의료 혜택을 받았던 왕은 밤샘 국정 업무나 정적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서인지 평균 수명 나이는 46세였다.

왕만큼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양반 계층은 노비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유학자로서 절제된 삶과 학문 탐구를 하는 유유자적한 삶을 누려서 인지 조선 시대 평균 수명 나이를 훌쩍 넘기며 장수 하는 인구층이 가장 많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예술가는 죽어서 작품을 남긴다.

반면 정치인들은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유리 지갑을 가진 백성들은 죽어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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