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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able feast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삼촌이 운영 하고 있는 출판사 '보들리 헤드’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한 앨런 레인은 1920년 투병 중인 삼촌을 대신 해서  출판사 운영에 전면으로 나선다.

1918년 부터 잡지에 연재 되기 시작했던 아일랜드 태생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1920년 프랑스 파리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실비아 비치가 작가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며 출간하자 매출 하락에 고심했던 앨런 레인이 판권을 사들인다.

보수적인 미국 출판계와 문학계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불온 서적으로 낙인 찍어 버리자 앨런 레인은  <율리시스>를 출판하는 과정에서 이사회와 갈등을 겪게 된다.

1934년 앨런 레인은 이사회를 설득해서 출판 수익에 도움이 될 책들을 출간 하겠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이자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를 직접 만나 출판을 설득 하고 돌아가는 길에 기차역 서점에 들려서 기차 안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기차역 내 서점에 즐비한 책들 중에  읽을 만한 책은 지나치게 비쌌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책은 내용이 허접했다.

이 책 저 책을 집어들던 앨런은   담배 한 갑 가격인 6펜스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가볍고 양질의 지식과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한다.

(C)Penguinbooks

1935년 우아한 연미복을 입고 뒤뚱 거리는 귀여운 걸음걸이의 날지 못하는 펭귄이 서점계에 등장하자마자  소수를 위한 무겁고 비싼 장식품이던 책을 누구나 손에 들고 다니며 즐길 수 있는 손 안에 책 한 권 시대가 찾아 왔다.

1930년대 영국의 출판시장은 고전문학이나 당대 주목 받는 작가들의 책을 가죽 커버로 탄탄하게  장정한 방식으로 제작되어서 부유한 이들이나  집안에 별도의 서재 방이 있는 상류층이나 학식 있는 사람들이 주로 구매 했다.

도서관 조차 이용하기 힘든 일반 서민들과 하층민들은  신문에 연재 되는 코믹이나 통속적인 스토리에 빠져 있거나 값싼 종이에 한없이 가벼운 내용들만 채워진  낮은 수준의 책들만 겨우 구매 해 볼 수 있었다.

 전혀 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남극 생태계 먹이 사슬의 중간 쯤에 위치한 온순한 조류 펭귄이 커버에 새겨진 책을 기획, 출판한 앨런은 가볍고 간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집중적으로 출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양질의 책을 구매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부담 없는 가격에 문고본 펭귄 책의 등장은  ‘책’의 개념을 뒤 흔들어 놓은 출판 혁명의 상징이 되어서  주머니나 가방 속에서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이 대 유행이 되었다.

1940년 독일 루프트바프 공습으로 런던 도시 곳곳에 무시 무시한 폭격으로 불에 타올랐던 나날 속에서도 런던 시민들은 방공호에서 라디오에 귀 기울이면서  책을 읽었다.

런던 시민들은 낮과 밤으로 대 공습이 점차 격렬해져서 한 밤중에 폭격을 피하기 위해  등화관제가 실시 되는 동안에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서 불타 버린 책들을 찾아 읽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 재학 당시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 참전한 샐린저는 4년 동안 군복무를 하는 동안  펭귄 문고본을 군복 속에 넣고  전쟁터에 나갔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읽었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폭격기를 몰고 한반도 상공을 날았던 공군 조종사 출신의 작가 제임스 설터는 비행에 앞서 펭귄 문고본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고 지상으로 내려 왔을 때는 작가의 꿈을 키우며 글을 썼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 했던 작가 조지 오웰은 '만일 사람들 손에 5실링이 있다면  책은 한 권만 사고 남은 돈은 영화 티켓을 사 버릴 것'이라며 펭귄 문고본은 곧 폐간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작가 오웰의 예측과 달리 1935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애거사 크리스티의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첫 출간 하기 시작한 펭귄 북은 첫 번째 발행에 약 300만권을 판매 하며 폭발적인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출판 디자이너 에드워드 영에게 런던 동물원에 직접 가서 펭귄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관찰해 스케치로 기록한 뒤 로고 디자인에 반영하라고 지시한 앨런 레인의 출판의 첫 번째 목표는  ‘저렴하고 질 좋은 책’을 출간 하는 것이였다.

런던이 독일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불에 타오르는 순간에도 매년 600권의 책 출간을 강행 하며 세계 고전 문학을 추려낸 펭귄 클래식 시리즈부터  과학·철학·역사·사회학 등 분야별 교양을 다루는 임프린트 ‘펠리컨 북스’,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펭귄 스페셜’까지 다양한 장르와 전문적이면서 심도 있는  시리즈를 출판했다.

대형 쇼핑 온라인 몰 아마존의 등장으로 종이책이 사양길에 접어 들었어도 펭귄북은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출간하며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수천 년간 살아남은 펭귄처럼 소수를 위한 무겁고 비싼 장식품이던 책을 누구나 손에 들고 다니며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바꿔 놨다.

한국 출판 시장에서 한 손에 들어가는 문고본보다 하드커버에 화려한 띠지와 양면이 컬러인 종이 커버까지 씌운책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출간되고 있다.

OTT채널 한 달 구독료 보다 책 한 권이 비싸고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선호 하는 시대에 다양한 종류의 양질의 시리즈를 꾸준하게 출판하는 출판사가 있다.

민음사 출판사가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 하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은 1998년 첫 열 권의 책으로 출발해서 2026년 500번째 책이 출간 되었다.

세문집의 500번째 책은 1946년 독일에서 출간돼 현지 교과서에도 실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로  식민지 시기 조선을 떠나 독일로 건너간 작가의 자전적 삶이 투영된 작품이다.

“새로운 기획, 새로운 번역, 새로운 편집”을 모토로 내걸고 출판한 민음사의 세문집은  당시 출판계에 흔했던 일본어 중역과 무단 번역을 배제하고  원전 번역과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책 뒷 표지에 명시에 두었다.






민음사 세문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국 책 출판계에서 보기 드문 책 판형이다.

세로로 길죽한 판형이여서 배낭을 제외하고 평균 사이즈 가방에 들어가지 않아 에코백에 넣어야 한다.

가격도 착하지 않다.

만 원 이하의 책은 중편 소설 그 중에서도 저작권이 소멸된 고전 작품에서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품을 제외하고 저작권이 소멸된 작가의 작품 모두 만 원이 넘고 장편 소설은 두 세 권으로 쪼개서 출간 되고 있다.

어떤 출판사든 오타와 오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민음사 세문집 출간 모토인 [새로운 기획, 새로운 번역, 새로운 편집]이라는 선언에 어긋나는 책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건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이다.

<파리 대왕>의 첫 문단 원문과 민음사 번역본을 대조 해 보면 

CHAPTER ONE

The Sound of the Shell

The boy with fair hair lowered himself down the last few feet of rock and began to pick his way towards the lagoon. Though he had taken off his school sweater and trailed it now from one hand, his grey shirt stuck to him and his hair was plastered to his forehead. All round him the long scar smashed into the jungle was a bath of heat.

민음사 번역

금발의 소년은 몸을 굽히듯이 해서 이제 마지막 바위를 내려와 초호 (礁湖) 쪽으로 길을 잡아 조심스레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복이었던 스웨터는 벗어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있었고 회색 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풀칠이라도 한 듯 이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정글을 후려친 소년 둘레의 흉터 자국은 온통 열탕 (熱湯)처럼 무더웠다. 

첫 문장부터 원문과 대조 해서 읽어 보면 원문에서  All round him the long scar smashed into the jungle was a bath of heat.이라는 부분을 "정글을 후려친 소년 둘레의 흉터 자국은 온통 열탕(熱湯)처럼 무더웠다." 라고 번역했다.

1)가장 먼저 이 번역은 문장 구조를 완전히 잘못 파악했다. 이 문장에서 정글을 친(smashed) 주체는 소년이 아니라 비행기 추락으로 인해 생긴 '긴 흉터 자국(the long scar)'이다. 

즉, "정글을 가르고 들어가 불시착 흔적을 남긴 긴 흉터 자국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곳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로 번역해야 맞다. 하지만 번역본은 느닷없이 소년이 정글을 후려친 것처럼 주어를 오인했다.

2) 원문 and this cry was echoed by another 문장을 민음사 번역본은"이어 다른 고함소리가 이것을 받았다."라고 번역했다. 뒤이어 나오는 대사(“Hi!” it said, “wait a minute!”)는 고함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수풀에 걸려 다급하게 부르는 피기(Piggy)의 목소리다. 

원문에서 'cry'는 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인간의 외침을 연결하는 단어인데, 민음사 번역은  '고함소리'로 번역해서 인물의 상태(뚱뚱하고 숨 가빠하는 아이)와 어울리지 않는 공격적인 뉘앙스를 담았다.

3) 원문에서  with an automatic gesture that made the jungle seem for a moment like the Home Counties. 부분을 민음사 번역은 "그 동작이 아주 익숙해서 마치 거기가 정글 속이 아니고 런던 주변의 주(州)이기나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로 번역했다. 원문에서 automatic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반사적인 동작을 뜻하는데 영국 문명사회(Home Counties)에서 늘 하던 습관(양말을 치켜올리는 행동)이 몸에 배어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다. '익숙해서'라는 표현은 맥락상 다소 비껴 나갔다.

4) 원문에서  “I got caught up”를 민음사 번역본은 "난 온통 걸려 있어."라고 번역했다. 소설 속 상황에서 소년이 덩굴 같은 것에 옷이나 몸이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므로, "나 (덩굴에) 걸렸어" 혹은 "단단히 묶였어" 로 번역해야 자연스럽다. 

5) 원문에서  a bird, a vision of red and yellow, flashed upwards 민음사 번역은 "붉고 노란 환영(幻影)인 듯한 새 한 마리가 홱 날면서"라고 번역 했다. 이 문장에서 vision을 사전의 1차적 의미인 '환영(유령 같은 느낌)'으로만 해석했다.

원문에서  vision은 정글의 칙칙함 속에서 강렬하고 눈부시게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색채의 잔상"이나 "황홀한 광경"을 뜻하는 것이다.

뉘앙스를 온전하게 살리지 못한 번역문을 읽으면   '환영인 듯한 새'는 다소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어 원문의 시각적 선명함을 반감시켜버린다.

6) 원문 a greasy wind-breaker.라는 문구를 민음사 번역본은 "기름 때 묻은 재킷"으로 번역했다. 이 문구는 앞서 등장한  피기(Piggy)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다. greasy는 진짜 기름 때가 묻었다기보다는, 뚱뚱한 피기의 체질상 땀과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바람막이 점퍼를 의미한다. '기름때 묻은'은 단순히 지저분한 옷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에 원문에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은 첫 문단부터 교복 스웨터- 스타킹을 올리는 행위-번들거리는 옷 같은 인물의 상태나 행동 묘사를 통해 문명과 야만의 시각적 대비를 주며 작품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단서다.

하지만 번역은 이를 온전히 살려 내지 못하고 사전적 의미의 직역으로 해석했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지라도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 첫 문단의 핵심인 '비행기 불시착으로 처참하게 찢긴 정글(scar smashed into the jungle)'의 주어를 오독하여 문장을 꼬아버린 명백한 오류를 범했다.

영국 노동자 하루 임금의 20분의 1에 불과한 권 당 6펜스 가격표가 붙었던  문고본 펭귄북스는 20세기 급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친노동자 성향의 중산층을 두텁게 만드는데 기여하며 1960년대 계층의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사회 혁명의 중심축이였다. 

 가방 속에 책은 없어도 스마트 폰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시대에 책은 주머니 속 사치품으로 전락한 것일까?

'책은 소장품 아닌 읽는 것'이여야 하고  출판사는 독자들에게 원문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린 번역본을 읽을 수 있게 노력 해야 종이책의 생명력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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