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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able feast

태생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드가는 1870년 초반 서른 여섯의 나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의 왼쪽 시력 역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여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거나 주변만 보이는 현상을 겪게 되자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버린다.

한동안 드가는 자신의 시력 장애를 받아 들이지 못한채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자포자기한 상태에 빠졌다.

밝은 빛 아래의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 할 수 없게 된 드가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숨어지내듯 생활 하면서도 그림 작업을 포기 하지 않았다.

시력이 악화 되면서 드가는 염료를 섞거나 광택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파스텔로 겹겹이 색의 층을 만들어서 입체적인 회화 효과를 내기 시작한 드가는 지속적으로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 하기 시작한다.

동판화, 애쿼틴트 판화,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모노타이프 작업을 하던 드가는 밀랍과 찰흙을 만지면서 자신이 즐겨 그리던 작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형해 나갔다.

1874년 드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에드몽 콩쿠르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시력 상실로 모델의 형태만 간신히 볼 수 있었던 드가는 모델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흙을 쥐고 있던 그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서서히 그 찰흙은 모델을 닮아 갔다."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던 드가는 조각을 통해 대상의 형태와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탐구 해 나갔다.

1875년 파리에 대리석 장식과 금박 장식의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에 부유한 특권층이 몰려 갔다. 

온 몸을 완전히 가리는 긴 드레스를 차려 있었던 귀족 여성들과 달리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팔 다리를 드러내고 얇은 재질에 의상을 걸친채 춤을 추니 이들을 보기 위한 남성들이 발레 공연장을 찾았다.

정기권을 구입한 남성 관객들은 공연 시작 전이나 막간 또는 휴게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용수들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이들 틈에 화가 드가도 끼여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드가는 공연이 시작 되기 전 무대 뒤와 계단, 관람석에서 무용수들의 모든 움직임을 빠른 손놀림의 파스텔 스케치로 그렸고 늦은 저녁 작업실에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당시 발레단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들은 주로 노동 계층에서 선발 되었는데 일곱살 또는 여덟살 때 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가난한 가정 환경에 부모로 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발레단의 소녀들은 온 종일 공연 연습에 몰두 해야 했다.

발레단의 어린 소녀들의 열악한 환경을 잘 알고 있었던 드가는 휴게실이나 무대 위에서 스텝과 군무, 그리고 앙상블까지 단 한 순간도 쉴틈 없이 훈련을 해야 했던 어린 무용수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가게 점원, 세탁부, 하녀, 카페나 경마장등 공공장소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즐겨 그렸던 드가는 돈으로 쾌락을 사는 남성들과 달리 어린 소녀들에게 부성애적인 시선으로 대했다.

무용수들도 드가를 좋아했다.

그들은 드가가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 주고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에 고마워 하며 진심으로 그의 모델이 되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드가가 작업 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 본 한 무용수는 그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드가 선생님은 손에 연필을 들고 장옷 밑에 숨겨 둔 스케치북에 자신이 본 것을 재빨리 기록했어요. 오페라 하우스에 불이 꺼지면 그분의 모델이 된 무용수들이 스튜디오에 찾아갔어요. 무대 뒤에서 우리를 지켜 보았던 시선과 달리 드가 선생님은 아주 엄격한 작업태도로 다양한 포즈를 취할 것을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몇 시간씩 포즈를 취하는 동안 드가 선생님 손에 쥐어진 찰흙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나가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어요."

1880년 제 5회 인상주의자 전시에서 드가는 일종의 맛보기로 빈 유리장을 전시하더니 그 다음 해에 90센티미터의 실제 머리카락과 리본, 천으로 만든 조끼, 모슬린 무용복에 분홍색 발레화를 신은 황금빛 밀랍의 인간 피부처럼 따뜻하면서 말랑한 질감의 조각상을 공개했다.

1881년 제6회 파리 인상주의 전시에서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가 등장 했을 때 행사장은 술렁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뒷발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소녀상은 야생 새끼 짐승처럼 듬성 듬성한 머리카락에 감긴 눈, 조금 경사진 이마, 새의 부리 같은 입술에 툭 내민 턱, 길게 늘어뜨린 노란색 리본, 유난히 두꺼운 목, 핀으로 고정한 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들린 엉덩이, 살짝 나온 아랫배, 단추를 몇 개 풀어 어깨에 살짝 걸친 조끼, 가는 허리, 누더기가 된 치마, 호리호리한 다리, 등 뒤로 마주 잡은 가는 팔과 손을 한 조각상을 마주한 관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랬다.


실제 피부색과 비슷한 밀랍으로 빚어서 일까?

깔끔한 외모, 탄탄한 몸매 등 말 그대로 ‘조각 같은’ 조각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의 눈에 드가의 소녀 조각상은 예술은커녕, 이집트 미라나 아프리카의 물신이나 부두교 같은 불길한 상징물처럼 보였다.

평론가들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조각상을 향해 “원숭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장이 아닌)동물원이지 않은가.” 신랄한 악평을 쏟아 부었다.

작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는 드가의 조각상을 가리켜 현대적인 시도라며 "조각에 대한 모든 생각, 차갑고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순백색, 수 세기 동안 복제되었던 예술의 관습을 뒤흔들어내며 전통을 부숴 버린 작품이라 이례적으로 호평 했다.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예술계는 드가의 조각상을 향해 “타락의 꽃”, “악덕과 혐오”, “흉악한 분위기” “악취미로 빚은 인체 표본”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쏟아지는 악평과 비난에 드가는 작업실 구석 옷장 문을 열고, 조각상을 깊숙이 밀어 넣고는 두 번 다시 세상에 공개 하지 않았다.

드가의 작업실 옷장 문이 잠기고 나서 <열네 살의 어린 무희>는 이대로 영영 어둠에 잠겼을까. 

소녀의 이름은 마리 반 괴템 

소녀는 오페라단의 하급 발레 무용수로 무대 뒤 소품 같은 존재 였다.

발레단엔 마리 같은 소녀가 많았다. 그러니 딱히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이런 하찮은 발레단의 소품 같은 소녀들은 보잘 것 없고 빈약하고, 하찮다며 ‘작은 쥐’(Petites Rats) 무리라고 불렸다.

마리는 186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벨기에계 이민자로 아버지는 재봉사였고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마리에게는 큰 언니 앙투아네트가 있었고 한 살 많은 작은 언니도 있었지만, 출생 한지 18일 만에 사망했다. 

마리가 태어나고 5년 후 여동생 샤를로트가 태어났다.

마리 가족의 터전은 파리 9구. 

프랑스 전역에서 몰려온 가난한 예술가들, 거리의 부랑자들 노동자와 매춘부가 몰려 있는 그 곳은  토끼 굴보다 비좁고 비 위생적인 환경에 일명 파리에서 하수구로 불렸던 곳이다.

 마리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방 값이 몇 달 씩 밀려 쫓겨나듯 자주 이사 갔다.

당시 빈민층 부모의 자녀들 중 소년은 광산과 농장으로 팔려 갔고 소녀는 공장이나 공연이 열리는 무대를 가야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생계가 어려워진 마리의 엄마는 자신의 딸 셋을 모두 발레단에 보냈다.


1878년,  마리는 열세 살이 된 그해 드가의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너, 9지구에 사는 그 꼬마 맞지?”


드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마리예요.” 마리가 답했다. 

“우리 종종 봤지?” 드가가 물었다. 

“네, 맞아요.” . 

푸른색 안경을 쓰고 있는 드가는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내 모델이 돼줄래?.”


드가는 마리에게 4시간당 6~10프랑 사이 사례비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육점 고기 한 근이 1~2프랑이었다고 하니 하급 계층 생계 기준에서 상당히 후한 금액이었다.

드가는 남아 있는 왼쪽 시력으로 멍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든 마리를 3년 동안 지켜 보며 발레리나의 화려한 몸짓이 아니라, 그 몸짓을 만들어낸 수많은 땀방울과 버팀의 시간을  빚어내듯 밀랍이나 찰흙으로 속을 채울 때는 성냥이나 종이, 코르크, 막대기, 헝겊, 밧줄, 목재, 스펀지, 옷감, 담배, 부러진 붓 같은 걸 함께 집어 넣었다.


3년 동안 드가의 작업실에 찾아가 모델을 섰던 마리는 지각과 불복종 등을 이유로 몇 차례 임금 삭감과 같은 징계를 받더니 조각상이 전시 되었던 1881년 오페라단에서 쫓겨났다.

1903년 미국인 루이진 헤브마이어가 뒤랑뤼엘을 통해 열네살의 어린 발레리나 조각상을 사려 했지만 드가는 응하지 않았다.

드가는 자신의 조소 작업이 동작과 균형을 연구하기 위한 습작일 뿐이라며 살아 생전 작업실 밖으로 소녀의 조각상 내보내지 않았다.

훗날 드가는 화상 볼라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청동으로 만들어두면 내가 죽은 뒤로도 영원히 남을 텐데 그런 걸 남긴 다는 것은 부담스러워."

마리가 오페라단에서 퇴출 당하기 몇 달 전, 신문 《레벤느망(L‘Evenement)》은 “(예술가 드가의 모델)마리가 르 라 모르(Le Rat Mort) 주점을 자주 오간다”는 식의 기사가 실렸을 뿐 현재까지  소녀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도 없고, 흔적도 없다. 

1917년 드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업실 옷장 속에 갇혀 있었던 작은 밀랍상은 조각가 알베르 바르톨로메의 손을 거쳐 청동상으로 주조 되었다.

마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열 네 살의 소녀가 정말로 바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는  복제폼 28개로 주조 되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가 되었다.

예술은 늘 멋진 해답을 주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있도록 작은 창 하나를 열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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