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moveable feast

겨울이 성큼 찾아 오니 밖을 나서기 전 챙길 것들이 많다.

머플러, 장갑, 모자, 마스크 그리고 언제나 몸과 혼연 일체여야 하는 스마트 폰...

옷이 두툼해지는 겨울에는 가능한 가방 속에 많은 물건을 넣고 다니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른 것은 빼놓더라도 종이책은 반드시 가방 속에 넣고 다니고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 마자 커피를 내리는 시간 동안 오늘 하루 나와 함께 할 책을 고르는 것도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무작위로 눈에 들어 오는 책을 고를 때도 있고 전문 지식분야를 쌓기 위한 책일 때도 있고 누군가의 추천을 받은 책일 때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책을 선택 할 때는 그동안 무심코 클릭한 것들이나 구입한 목록들의 정보를 수집한 알고리즘 추천을 가능한 의지 하지 않고 내 스스로 특정 주제를 정해 놓고 내가 구상하고 원하는 포트폴리오에 맞춰 책을 선택하고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종류와 여러 장르의 책을 읽을 수 구독 서비스 책읽기도 1년 동안 해보았다.

전자책은 종이책을 읽는 속도에 비해 압도적으로 빨리 읽어도 제대로 완독 하는 책도 없었고 눈으로 스킵을 하다 보니 머릿 속에 남는 구절도 없었다.

특히 전자책을 읽다가 다른 앱을 열고 딴짓을 하기 일 수였고 이 책을 클릭하다가 또 저 책을 클릭하며 앞 장 몇 구절만 읽다 만 책들이 수두룩하다.

여전히 이북 기기와 스마트 폰에 저장된 책은 천 여권이 넘지만 지구가 종말 하기 전까지도 저장된 책을 전부 읽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다양하게 볼 거리가 넘쳐 나는 세상에 300페이지가 넘는 소설 한 권에 집중하기도 힘들다.

몇 주전 영화 <국보>를 보고 나서 일본 가부키 극에 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유툽이 없던 시절이라면 분명 국보 원작을 구입해서 읽었을 것이고 가부키에 관한 책이 있는지 찾아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두 권을 완독 한 다음엔 일본 근 현대사 책을 찾아 그 시대 역사에 대해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감명 깊게 보았던 마지막 장면을 OST와 함께 보기 위해 유툽에 접속하니, 가부키에 관한 영상이 주르륵 떴다.

추천 알고리즘을 따라가 보니 가부키 역사부터 분장, 유명 가문과 공연에 대한 여러 정보를 10분 내외 영상으로 모두 섭렵할 수 있었다.

이런 시대에 책을 왜 읽어? 유툽이나 넷플릭스를 보면 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자 중독인 나는 요시다 슈이치의 국보를 종이책으로 구입했다.










[막이 단숨에 걷히자, 불길한 태고 소리와는 정반대로 무대 위에는 큰 눈 속에서 어째서인지 벚꽃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중앙에 선 큰 벚나무, 천장에선 만개한 벚꽃 가지가 가득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 호화로운 무대를 보며 객석에서 탄식이 새어 나오고, 태고 소리가 더욱 높이 울려 퍼진 바로 그때, 거목 줄기에 걸려 있던 까만 천이 스르르 풀리면서 나무 안에서 유녀遊女 스미조메墨染가 나타났습니다. 강한 조명 아래 드러난 것은, 연회색 옷감에 늘어진 벚꽃 가지 장식을 수놓은 복장의 유녀 스미조메. 츠부시시마다(つぶし島田: 에도시대 후기에 유행한 머리 모양-옮긴이) 스타일의 머리를 수많은 기생용 비녀로 꾸민 모습입니다. 예상치 못한 변주에 객석에선 파도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2대손 하나이 한지로도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호오. 세키노토関の扉인가?” 이것이 바로 가부키 무용극의 명작 <쌓이는 사랑 눈 세키노토>의 명장면으로, 무대 아래쪽에는 이야기꾼 역할을 맡은 게이샤들과 샤미센이 쭉 늘어서고, 큰 벚나무 옆에는 관문지기인 세키베이関兵衛가 가만히 대기하고 있습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국보> 중에서






인공지능(AI)이 일상과 일터 학습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사용 되면서 이전과 상당히 달라진 세상이 삶의 깊숙한 영역까지 파고 들었다.

강의 음성만 녹음하면 AI가 요약본과 정리 노트, 예상 문제까지 만들어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해서 학생들은 더 이상 수업을 듣고 손으로 필기 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수업에 출석하지 않고 녹음본을 사서 AI를 활용해 학습하거나 비대면 수업 강의에서는 사전이나 법전 종이책을 펼쳐 놓지 않고 AI를 학습 도구로 적극 사용하고 있다.

리포트는 기본이고 복잡한 코딩, 정보 분석까지 AI가 순식간에 해내다 보니 학생들은 AI에 사실상 모든 것을 위임하고 있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젠 어디서든 AI를 사용하지 않으면 구 시대 사람 취급을 당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AI 몰고오는 광풍은 허리케인 급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AI를 ‘어떻게 쓰나’를 고민했다면 이젠 ‘AI 없인 어디에도 못 가고 일도 공부 못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TV가 아닌 AI ‘바보상자’가 덮친 세상에서 선택한 책은 최신 AI트렌드나 사용 방법에 관한 책이 아닌 살만 류슈디의 <진실의 언어>다.

부커상 3관왕 수상에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 출간 이후 이슬람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에 시달려왔다.

목숨이 위태로운 시기에 은둔 하지 않고 왕성하게 집필하며 전 세계인을 향해 펜의 힘을 보여 줬던 살만 류수디는 2022년 여름 미국 뉴욕대가 주최하는 문학 강연 연사로 초청 받아 무대에 오르는 순간 괴한이 휘두르는 잔인한 칼 끝에 한 쪽 팔과 한 쪽 눈을 잃어 버렸다.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은 살만 루슈디는 현재 왼쪽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고 한 쪽 눈 시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살만 루슈디는 자신을 향한 칼에 펜으로 맞서며 언어로 세상을 베고 찌르면서 종교의 관습과 굴레로 겹겹이 쌓여 있는 불평등을 향해 진정한 자유의 힘이 무엇인지 언어의 힘으로 증명해 보였다.

회복 기간 동안 써 내려간 <나이프>에서 루슈디는 이런 말을 한다.


합리주의자의 신앙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해. '사람은 자신의 열정에 어울리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신을 믿고, 자신의 잔인함에 핑계를 대기 위해 믿음을 이용한다. 오직 친절한 사람만이 친절한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경우에든 친절하게 행동한다.

-살만 루슈디의 <칼> 중에서


죽음의 칼 끝이 자신의 몸을 관통 해서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살아 돌아 온 살만 루슈디는 <진실의 언어>라는 책에서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가장 유감스러운 기질은 무엇입니까?”


일터나 사적인 장소에서 MBTI로 상대가 내 기질을 궁금해 하고 물을 때면 어느 순간엔 I이였다가 E일 때도 있고 F일 때도 있다는 대답에 상대방은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혈액형이 같다고 기질도 똑같지 않듯이 MBTI로 상대의 기질을 정확하게 나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MBTI로 편을 가르며 섣불리 장 단점에 대해 낙인을 찍어 버린다.

1인 SNS와 유툽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 만나 본 적 없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대는 쓰잘데기 없는 말이 넘쳐 나는 시대다.

특히 챗 GPT의 등장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믿고 말하게 되어서 스스로 생각하고 유추하며 의문점을 찾아 해결하고 처리 하는데 쓰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말만 하면 척척 원하는 걸 찾고 해결 하는 시대에 진실된 말과 언어, 문장들이 챗 GPT의 힘을 빌려 하는 말들과 뒤섞여져서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챙겨 먹듯이 타인과 다른 세상을 향한 왕성한 호기심에 무엇에 대한 것이든 찾아 읽으며 학습해 나갔다.

인간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설령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 일지라도 그 이야기 속에서 사랑과 증오, 용기와 비겁,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는 ‘진실’을 찾아 다녔다.

종이책, 전자책 그리고 유툽 영상까지 현 시대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 상당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보고 경험하고 맛보고 시험해보고 보여주는 것들 뿐이다.

전문가나 특정 기술을 연마 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일반인들의 관심을 단번에 끌어내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반면 넷플릭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슷비슷한 포맷의 예능물과 드라마들이 고스란히 소설의 장르로 배어 들어서 뛰어난 상상력 보다 주변에서 흔히 찾아 보고 마주 할 뻔한 일과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신간들 중에서 읽는 맛을 느끼게 하는 책이 드물어졌다

무릇 이야기란 신비롭고 흥미롭고 초현실적이며 때로는 상스럽기도 해야 영상 시대에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야기는 비록 상상력으로 빚어졌을지라도 걸핏하면 서로 다투며 증오하고 미워 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순 덩어리 인간이 유일하게 ‘진실’에 도달 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준다.

살만 루슈디는 작가들이 제대로 구사해낸 '거짓된 진실'이야말로 현재와 같이 진실이 모든 곳에서 공격 받는 시대에 진정으로 이야기의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된다고 말한다.

현 시대는 자기 이익과 결부된 거짓말이 감쪽같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여론을 선동해서 좀 더 믿을 만한 정보가 오히려 '가짜 뉴스'라고 퍼뜨린다.

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었던 진실이 현 시대만큼 논쟁적이였던 적은 없었다.

AI 시대에 인간은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더 이상 누군가의 말에 경청하지도 않고 복종하지도 않고 매일 숨 쉬는 공기만큼 믿기 힘들 거짓 정보가 곳곳에 떠다니고 있다.

진실이 결여된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AI가 거짓을 찾아 내 줄 수 있을까?

무엇이든 상상해서 말과 글로 지어낼 수 있는 인간의 자아는 동시에 많은 자아가 될 수 있는 존재다, 허구의 세상을 보여주는 문학은 이런 인간의 다면적인 자아와 모순된 기질을 다른 시각으로 보여준다.

해고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왜냐하면 기업이 더 이상 사람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던 일 만큼을 해내는 것을 넘어 10배, 100배의 생산성을 가진 AI의 경쟁력이 막강해져서 가까운 미래에 기업은 사람이나 특정 부서가 수행하던 기능과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AI를 구독할 것이다.

엄청난 생산성을 가진 AI의 구독료가 월 최저 급여의 절반도 안 된다면 기업의 경영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직원 소수와 다수의 AI 에이전트들로 재편될 미래 사회에 기업은 더 이상 사람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은 AI에게 일자리를 물어보고 AI가 던져준 일을 처리하는데 급급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AI로 인해 구조 조정 당한 인간에게 도래할 미래는 중세시대 만큼 암울하다.

AI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 가능성에 거품론이 제기되고 있는 이 시기에 미래에 닥쳐 오게 될 해고 없는 시대에 대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에게 동등하게 할당 된 24시간을 누군가가 먹고 놀고 마시고 체험하고 즐기는 영상을 보는데 흘려 버리지 말아야 한다.

태초 이래로 이 세상은 여러 거짓과 진실이 이리 저리 뒤섞이면서 인간의 삶을 변화 시켜 왔지만 AI가 인간의 영역에 파고 들면서 중요한 정보와 완전한 쓰레기가 언뜻 보기에 동일한 수준의 권위를 가지고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AI 사용이 급증할 수록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평행 우주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해고 없는 시대에도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문자와 활자로 눈부신 발전을 이끌었던 인간은 제 3자의 시선으로 쓰여진 책을 통해 내면에 잠재된 본능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서 자아를 찾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해 왔다.

매일 쏟아지는 허풍쟁이나 비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불확실한 정보와 거짓들의 홍수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챗 GPT에 의지 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 보고 고민하고 사유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더더욱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오늘 내가 읽는 이야기는 결국 나의 일부가 되어 가치관을 형성하고 이 세상을 이해 할 수 있는 기틀이 되어 줄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손하지 않다. 광장에서 소리 지르기 시합인 경우가 많다. 논쟁에서 이길 기회를 잡고 싶다면, 그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 작가의 경우에는, 증거에 근거한 주장에 대한 우리 독자들의 믿음을 재건하고, 소설이 항상 잘 해오던 일,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사실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해를 구축하는 일을 해야 한다.

-살만 루슈디의 '진실의 언어' 중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살아 남은 작가 살만 루슈디가 펜의 힘으로 쓴 <진실의 언어>는 칼의 힘보다 강하고 거짓을 그럴듯한 진실처럼 말하는 챗GPT보다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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